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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고 Jul 14. 2024

경험과 나 사이

무더운 날씨다. 조금만 걸어도 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북한산 구간을 걷는데 산속에는 바람 한 점 없다. 일상적인 토요일이라면 제법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걷고 있을 텐데 날씨 탓인지 아니며 휴가 탓인지 사람들이 별로 없다. 오히려 걷기에는 한적하고 조용하고 좋다. 주말에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 서로 길을 비켜가며 걸을 때도 있었다. 그에 비하면 오늘 같은 날은 사람도 별로 없고, 소음도 없어서 걷기에는 매우 고맙고 행복한 날이다. 간혹 들리는 새소리 외에는 다른 동물들의 움직임과 소리도 들을 수 없다. 오직 우리들의 웃음소리와 즐거운 대화소리만 들릴 뿐이다. 북한산을 우리만의 휴양소로 사용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출입을 제한하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더위에 지쳐 또는 다른 사정으로 인해 우리의 휴양소를 찾지 않는다.      


화계사 일주문에 합장 반배를 올린다. 늘 사람으로 북적이던 화계사도 조용하다. 마치 모든 세상이 정지된 느낌이 들 정도다. 더위 속에서 북한산 서울 둘레길 구간을 걷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조금만 걸어도 땀이 흐른다. 땀을 닦아도 또다시 땀이 솟아난다. 우리 몸이 마치 땀의 우물 같다. 땀을 퍼내고 퍼내도 땀의 샘은 마르지 않는다. 물을 마시며 땀의 샘을 채우고, 다시 걸으며 땀을 배출한다. 이 과정의 반복 속에 길을 걷는다. 어쩌면 오늘 걷는 길벗들은 정상이 아닐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정상인 사람은 이런 날 산을 오르거나 힘든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도 걷는다. 걷기와 날씨는 무관하다. 날씨를 가려 걷는다면 일 년 중 걸을 수 있는 날이 며칠 안 될 것이다. 추워서 안 걷고, 더워서 안 걷고, 비가 와서 안 걷고, 바람이 강해서 안 걷고, 구름이 많고 흐려서 안 걷고, 햇빛이 너무 강해서 안 걷고, 이런저런 날을 제외하고 나면 실제로 걷기에 적합한 날씨는 찾을 수 없다. 날씨와 상관없이 식사를 하듯, 날씨와 상관없이 그냥 걸으면 된다. 

    

더위는 그냥 더위 일 뿐이다. 우리는 더위를 느낀다. 몸을 지닌 사람이기에 몸에서 더위나 추위를 느낄 수밖에 없다. 어떤 날씨나 외부 자극에도 우리는 감각을 느낀다. 추위도 느끼고, 더위도 느끼고, 습기도 느끼고, 바람도 느낀다. 우리 몸은 외부 환경을 있는 그대로 느낄 뿐이다. 하지만 외부 환경과 몸의 감각 사이에 생각이 끼어들면서 고통이 시작된다. 더위를 그냥 느끼고 걸으면 되는데. 덥기 때문에 걷기 싫다, 귀찮다, 힘들다, 왜 이런 날 걸어야 하나?, 꼭 원래 계획했던 목적지까지 가야만 하나?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이런 생각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화가 나기도 하고, 짜증이 올라오기도 하고, 불만이 올라오기도 한다. 경험과 나 사이에 생각이 끼어들면서 걷기 싫어하는 마음은 더욱 강해지고, 이런 마음은 자신에게 고통만 안겨준다. 이 마음이 계속해서 발전하면 서울 둘레길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만들기도 하고, 다음에는 이 길을 다시 오지 않으리라는 각오를 다지기도 한다. 물론 망각의 힘 덕분에 다시 찾을 수 있는 확률이 찾지 않을 확률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지만.      


날씨는 우리의 통제 밖에 있는 상황이다. 우리는 통제할 수 있는 것은 통제하며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려는 시도는 쓸데없는 에너지와 시간만 낭비하는 꼴이 된다. 날씨는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그냥 받아들이면 된다. 물론 통제할 수 없는 날씨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걷거나 아니면 집에서 쉬는 것이다. 우리는 선택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선택과 통제는 다르다. 과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통제할 수 있을까? 우리 몸이라면 우리가 통제할 수 있어야 하고, 우리 생각이라면 이 역시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과연 몸과 생각을 우리가 통제할 수 있을까? 배가 고픈데 밥을 안 먹을 수 있거나 배고픔을 통제할 수 있을까? 화장실 가고 싶은 것을 통제할 수 있을까? 생각 역시 마찬가지다. 수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침묵 속에 걸으며 발의 감각에 집중하려는 시도는 늘 무너지고 수많은 생각이 올라오는 것을 한참 지난 후에야 알아차릴 수 있다. 생각은 다른 생각을 끊임없이 불러온다. 그나마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은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다.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통제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일이다. 틀림없이 우리 몸이고 우리 생각인데 우리 통제를 벗어나 몸은 몸대로 활동을 하고, 생각은 생각대로 제 멋대로 활동한다. 우리 것임에도 우리 것이 아니다.  

    

나 자신과 경험 사이에 끼어든 생각이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준다. 우리의 생각인데 우리가 통제할 수도 없고, 게다가 이 생각은 고통을 가져다준다. 좋은 생각도 계속되면 그 생각을 붙잡으려는 시도를 하고, 그 시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편한 감정이 올라온다. 나쁜 생각은 물리치려는 시도를 하지만 쉽게 사라지지 않고, 우리의 마음을 더욱 불편하게 만들어준다. 이도저도 아닌 중간의 생각은 쓸데없는 망상만 만들어낸다. 나 자신과 경험 사이에 끼어든 생각을 없애는 방법이 바로 마음챙김이다. 마음챙김은 지금 이 순간 경험하고 있는 자신의 경험을 오로지 느끼고 알아차리는 일이다. 더울 때 더위를 느끼면 된다. 더위로 인해 이런저런 생각이 올라오면 생각을 물리치려고 노력할 필요 없이 그냥 몸에서 느껴지는 더위의 감각을 느끼면 된다. 이 방법이 어렵게 느껴질 수 있어서 발의 감각에 또는 소리에 집중하며 걷는 것이다. 생각이 올라오는 것을 알아차리자마자 바로 그때 몸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집중하거나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며 돌아오면 생각은 사라진다. 때로는 생각이 쉽게 사라지지 않을 수도 있다. 이미 생각이 많이 진전되었기 때문이다. 그때도 느끼는 감각에 집중하려는 노력을 조금 더 강하게 하면 된다.      


몸의 감각을 느끼며 걸으면 자기(ego)라고 생각하는 존재는 없어지고 오직 걷고 있는 몸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몸에서 느껴지는 감각만 남게 된다. 더위를 느끼고 땀이 흐르는 것을 느낄 뿐이다. 여기에는 감정이 들어올 공간이 없다. 생각이 끼어들면서 감정이 올라올 틈을 만들어낸다. 걷고 있지만 걷는 자기는 사라지고 오직 더위 속에서 걷고 있는 몸이 있고, 몸의 감각만 느낄 뿐이다. 자기이라는 에고는 사라진다. 생각과 감정이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면서 자기(ego)는 사라진다. 생각과 감정이 자신이 아니라는 탈동일시가 이루어지는 중요한 순간이다. 걷고 있는 것이 자기가 아니고 그냥 걷고 있는 몸 자체일 뿐이다. 길을 걸으며 우리는 자기라고 알고 있던 자기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그 자기는 자신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수많은 요구를 하고 있고, 우리는 그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평생 안간힘을 쓰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 자기는 ‘참 자기’가 아니다. 자신의 인식과 욕구와 감정이 만들어 낸 홀로그램에 불과하다. 허상이다. 즉 무아다. 자기라고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해방이 되면 저절로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게 된다. 고통은 욕구와 감정과 생각으로 이루어진 자기라는 허상으로 인해 발생한다. 길을 걸으며 특히 고통스러운 더위 속에서 길을 걸으며 자기라고 알고 있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자유인이 될 수 있다. 생각과 감정 없이 지금 하고 있는 주된 행동인 걷기를 하며 매 순간 느끼는 감각에 집중하며 걸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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