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긴 11시간 비행이 끝났다. 매번 비행기를 탈 때마다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지 모르겠다. 잠도 청해보고 영화도 보고 술 한잔도 기울이지만 도통 시간이 안 갔다. 이번 여행은 특히 직항이어서 그런지 더더욱 지루한 느낌이 강했다. 보통 경유지에서 넉넉히 경유시간을 갖고 커피 한잔 하면서 공항 밖 풍경을 보는 게 소소한 재미였는데 이번엔 바로 바르샤바로 도착했다.
비행기가 착륙하기 전 미리 유심칩을 꺼냈다. 보통 나는 비행기가 착륙하기 30분 전에 유심칩을 꺼내는 편이다. 왜냐면 착륙하고 짐 찾고 공항을 빠져나왔을 때 휴대폰이 안 터지면 불안하기에 미리 준비한다. 이번에도 미리 유심칩을 꼈고 착륙과 동시에 비행기가 브릿지를 찾을쯤에 휴대폰을 켰다. 잠시 후 문자가 여러 개 오기 시작한다. 문자의 내용은 유심칩 관련해서 안내 사항과 주의할 점 그리고 또 다른 문의가 있으면 링크로 접속하라는 내용이랄까. 유심 안내 문자가 낯설지가 않았다. 5년 내내 늘 똑같은 유심칩 브랜드만 이용해왔기에
아마 제일 먼저 나를 반기는 건 이 문자일 것이다.
비행기에 내려 착륙장에서 잠시 버스를 타고 게이트에 도착 후 짐을 찾으러 갔다. 짐을 기다리는 승객들은 몇 없어 보였다. 내가 탔던 비행기 승객들 대부분은 바르샤바가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 경유지인 경우가 많아 보였다.
한가로이 짐을 기다리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뭔가 낯설지가 않은 기분이었다. 2년 전이라 그저 어렴풋이 남아있을 뿐이지만 어딘가 익숙했다.
바르샤바 구시가지
Cześć 오랜만이야
출국장을 나오니 안나와 안나여동생 카롤리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안나를 보니 폴란드에 온 게 실감이 났다. 반가움 마음을 듬뿍 담아 오랜만에 허그를 했다. 카롤리나와도 처음 만났지만 마치 오랜 친구처럼 어색함 없이 인사를 했다. 낯선 공항에 이렇게 누군가 반겨주는 건 처음이라 감동이었다.
언제나 해외 공항에 도착했을 때 막막함이 앞섰다. 아무리 공항에서 시내 가는 법 아니면 공항에서 숙소 가는 법을 검색하고 기억하고 틈틈이 봐도 늘 입국장을 나오면 바보가 되어버리곤 하는데 이번엔 누군가 나를 위해 입국장부터 맞이 해주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친구들과 함께 우버 택시를 타고 숙소로 가면서 창문 밖 풍경을 구경했다. 우중충한 날씨 속에 중간중간 보이는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들과 주렁주렁 달려 있는 조명들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숙소는 다음날 브로츠와프로 이동하기 위해 일부러 버스 터미널 근처에 잡았다. 숙소도 여행 첫째 날 편히 쉬기 위해 나름 돈을 들여 호텔로 예약했는데 처음 혼자 호텔에서 편히 자는 거라 여러모로 기대를 안고 체크인을 했다. 체크인 후 간단한 짐과 친구들에게 줄 선물을 챙기고 1층 로비에 내려갔다.
폴란드에 가기 몇 달 전 부모님과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 하다가 안나의 선물로 무엇을 사면 좋을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안나가 이미 2년 전에 한국에서 교환학생을 했으니 한국 문화를 어느 정도 아니까 조금 더 특별한 선물을 준비하고 싶어 안나의 이름을 새긴 도장을 선물하기로 했다. 그래서 부모님과 함께 인사동에 가서 도장을 팠고 특별히 카롤리나에게 줄 선물로 2020 카카오프렌즈 달력을 선물하기로 했다.
안나 이게 한국식 도장인데 외국의 서명 같은 거야. 중요한 계약서를 써야 할 때 쓰는 건데 서명 대신 도장도 한 번 써 봐. 그렇다고 아무 계약서 도장 찍으면 안 돼(웃음)
안나의 성이 P로 시작해서 한국 성을 뭘로 할까 하다가 대중적인 '박'씨로 했다.
그리웠던 건 사람뿐만 아니라
안나가 저녁으로 뭐 먹고 싶냐고 물어봤다.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골롱카가 먹고 싶다고 했다. 그렇다. 폴란드에 오면 무조건 골롱카를 먹어봐야 한다. 골롱카가 먹고 싶었다. 한국에서는 먹어볼 수 없는 폴란드 전통 요리이자 피에로기와 더불어 꼭 먹어봐야 하는 골롱카. 물론 유럽의 돼지고기 요리가 비슷한 건 사실이다. 독일엔 학센 체코엔 꼴레뇨가 있는데 이름만 다를 뿐 식감이나 맛은 같다.
하지만 폴란드 음식을 처음 먹었을 때 입에 맞았다. 대부분의 유럽 음식들이 짜고 느끼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담백함이 있었다. 비록 기본 베이스는 단짠단짠일지라도.
2018년 크라쿠프에서 먹은 골롱카
마지막으로 먹은 기내식 이후로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 배가 고프기 시작하던 찰나에 안나와 카롤리나의 적극 추천한 골롱카 맛집으로 가 1인 1 골롱카를 주문했다.
골롱카가 나오자마자 포크와 나이프를 들어 한 점 자른 후 먹어봤다.
그래, 이 맛이었어.
그러곤 맥주 한 모금을 마셨다. 절로 감탄이 나왔다. 11시간 비행의 피로를 잠시라도 가시게 해주는 그런 청량감이었다.
잠시 크리스마스 시즌을 즐기러
저녁을 먹은 후 오랜만에 바르샤바도 구경할 겸 소화도 시킬 겸 가볍게 산책을 했다. 바르샤바 시내엔 벌써부터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일요일 저녁인데도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2년 전의 기억들이 조금씩 떠오르기도 했는데 잠코비 광장 근처 호스텔, 호스텔 건물 1층에 있는 Zapiecek이라는 식당, 광장 안쪽에 들어가면 나오는 자그마한 스케이트장까지.
모든 게 반가웠다.
바르샤바를 처음 왔을 땐 2월이라 저녁에 인적이 드물어서 허전했지만 12월에 오니 동네 분위기가 확 달랐다. 이렇게 북적북적하고 활기찬 광장이었다니. 날씨도 2월이 더 추웠고 바람이 불었지만 12월은 오히려 늦가을 날씨처럼 쌀쌀하기만 했다.
화려한 조명이 우릴 감싸고 있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광장을 지나 스케이트장에 갔다. 스케이트장 주변으로 작은 간이매점들과 그 주변에서 무언가를 먹고 마시는 사람들로 인파가 붐볐다. 크리스마스트리와 여러 휘황찬란한 줄줄이 조명 그리고 그 안에서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 분명 겨울이라 추웠지만 사람들의 온기로 따뜻했다. 이래서 크리스마스 시즌에 유럽을 와야 하는 건가 싶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긴 시즌인가 봐. 오길 참 잘했네.
한참을 이곳저곳 구경하다가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카페인 충전이 필요해 스타벅스에 가 커피 각각 한 잔 시켜놓고 그동안 하지 못한 근황 토크를 하면서 이런저런 세상 사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세례명이 스테파노라 스벅 직원에게 그렇게 써달라고 했다.
점점 헤어질 시간이 되자 안나와 카롤리나가 숙소까지 데려다주겠다며 우버 택시를 잡아 같이 숙소까지 갔다. 다음 날 또 일찍 브로츠와프로 가야 하기에 헤어지는 게 아쉬웠지만 언젠가 또다시 셋이서 만날 약속을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