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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화 Mar 11. 2022

사무실의 맥시멀리스트

“소화야 너는…”

“네?”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하겠다는 듯 팀장님은 눈알을 굴렸다. 그 시야 안으로 내 파티션 안쪽이 다 들어차나 싶더니.


“너는 정말… 회사를 네 집처럼 느끼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구나.”


하하. 넵.


단조롭게 눈만 웃으며 나는 팀장님을 따라 내 자리를 쓱 훑어보았다. 방금 막 붙인 엽서를 포함해  이것저것 카드와 그림을 붙여놓은 파티션은 알록달록하다. 그림은 부러 신경 써 고른 작은 네모 자석과 동그란 스마일 모양의 자석으로 붙여놓고 옆엔 스누피 자석도 하나. 갤러리 열듯 그림 배치도 신경 써서 붙이고 계절 따라 기분 따라 교체도 한다는 걸 팀장님이 아실까 몰라.


양쪽 파티션 사이의 작은 책상도 상황은 비슷했다. 내돈내산 동그란 키캡의 키보드, 빨간색 마우스와 서커스보이밴드의 마우스패드. 겨울이라 토끼가 붙은 가습기, 회사에서 나눠준 건 치워버리고 마음에 드는 걸로 새로 산 캘린더, 그 옆엔 일력, 내 강아지를 닮은 조그만 밀루 피규어…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다. 기를 쓰고 이 옥색 파티션과 황토색 책상을 내식대로 꾸며보려던 스물다섯의 내가 팀장님 눈에는 그렇게 보였나 보다. 회사에 정을 붙이려고 노력하는 걸로.


글쎄, 완전히 틀린 설명은 아니었지 싶다. 난생처음 만나는 사람들  황량한  책상을 ‘ 자리 느끼기 위해 나는 내게 제일 익숙한 일을 시작했던 거니까.  자꾸 주섬주섬 사모으고 갖다 붙이는 내가 팀장님 눈엔 이상한 다람쥐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말이지. 삭막한 사무실 한가운데,  비슷비슷한 파티션 사이에서  알록달록한 자리가 유난히 눈에 띄긴 했을 테다.


신입사원 때의 나는 팀장님의  한마디  마디를 기민하게 받아들였지만  부분에 있어선 모르쇠로 일관했고,  자리는 점점  다채로워지기만 했다. 사무실의 맥시멀리스트로 이름나는  금방이었다. 사람들은 종종  빌리거나 받으러 나를 찾아왔다.   이것도 있어? 감탄하는 , 그러나 의아해하면서.






그 뒤로 두 번의 이직. 그간 사무실에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구분하는 데는 도가 텄고, 이것저것 사보고 써보던 처음관 달리 정착템들도 몇 개 생겼다. 여러모로 더 업그레이드되기도 했고. 하여간 모든 걸 처음부터 시작할 필요 없이 기존에 쓰던 걸 왕창 들고 가기만 하면 되니 이른바 ‘정을 붙이는 일’은 더 간단해졌다. 두 번째 회사에서도 맥시멀리스트로 이름이 나서 ‘퇴사 날 이삿짐센터 불러야 하는 거 아니냐’는 농담도 하고 그랬다. 차를 끌고 가서 두 번에 걸쳐 짐을 날랐으니 영 없는 말도 아니었고. 하여간 시험 삼아 여러 번 바꿔보고 이걸 가져갔다가 저걸 뺐다가 하던 처음과는 달라서, 그걸 고대로 가져와 집에 쌓아뒀다가 세 번째 회사에 고대로 퍼 나르기 시작했다. 일명 나만의 사무실 키트랄까.


그래서 이번 회사에 정을 붙이는 일은 훨씬 쉬웠다. 입사 첫날부터 가방에   개씩 나의 아이템들을 챙겨 넣기 시작했으니까. 파티션이 없어  파꾸(파티션 꾸미기) 욕망을 채워주지 못했던  번째 회사완 달리  회사에는 다시 파티션이 있다! 것도  회사처럼 누리끼리한 옥색이 아니라 화이트&그레이로 아주 깔끔한 파티션이! 쾌재를 부른 나는 예전에 쓰던 자석들을 다시 꺼내 들었다. 오랜만이야 얘들아.


 최애 엽서들은 이미 대부분   벽에 붙어있지만, 그새 새로 모은 것들을 꼼꼼히 살펴 엽서도 챙겼다. 아끼는 제로퍼제로의 Dad&Daughter 시리즈  하나, 헤르메온느가 폴리주스를 만드는 장면의 스틸컷 엽서 하나,  붙여두었다가 필요할  바로 카드로 써서 선물하는 동그란 얼굴 모양 카드 하나. 거기에 친구가 생일선물로  포토프린터로  강아지 사진을 잔뜩 뽑아 그것도 챙겼다.  정도는 붙여줘야   자리 같지 . 첫날이었는데도 어색함이 없었다.


 뒤로도 일주일 동안 나는 몰래몰래 짐을 나르느라 바빴다. 아니 물론 일에도 적응을 해야 하지만, 일단 세팅을  끝내야 일도 되는 법이니. 16년부터 쓰던 토끼 가습기와 메모리폼 등받이 쿠션, 최근 추가된 듀오백  받침대와 퍼플 방석을  가져다 놓느라고 주말에는 차도 한번 동원했다.  깜짝할 사이에 가득   자리를 보고  자리 선배가 “소화님 못지않은 맥시멀 리스트셨군요.” 하고 반가워했다. 맞아요, 제가 바로  사무실의 맥시멀 리스트입니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고요. 저는  정도는 깔아 둬야 일이 되니까 뭐라 하지 말아 주세요.



사회생활 7년 차, 어째 업무 스킬보단 이쪽 스킬이 더 빠르게 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내 책상은 여기서 3년 일한 선배의 책상보다도 안락하고, 뭐든 필요할 때 굳이 찾으러 나설 필요 없을 만큼 잘 갖춰져 있다. 엽서와 사진과 작은 피규어로 인테리어(?)도 놓치지 않았다. 일이나 할 것이지 쓸데없는 데다 에너지 쓴다 싶을 수도 있겠지만 모르시는 말씀. 손에 익고 눈에 익은 것들로 빠르게 업무 환경 세팅을 마쳤으니 이젠 정말 일에만 집중할 수 있다고. 뭐 찾느라 두리번거리거나 뻘쭘하게 헤맬 일도 없고.


덕분에 새 회사 적응은 그 누구보다 빨랐다고 자부한다. 그거면 됐지. 앞으로 어딜 가든 봇짐 하나 짊어지고 가 풀어놓으면 바로 내 사무실이 될 테고. 맥시멀리스트는 이렇게 점점 진화하여 새로운 형태의 노마드가 된다. 언제고 다시 이직한대도 일주일 안에 사무실을 내 집처럼 만들 수 있는.


자, 세팅은 끝났다. 이제 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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