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화야 너는…”
“네?”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하겠다는 듯 팀장님은 눈알을 굴렸다. 그 시야 안으로 내 파티션 안쪽이 다 들어차나 싶더니.
“너는 정말… 회사를 네 집처럼 느끼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구나.”
하하. 넵.
단조롭게 눈만 웃으며 나는 팀장님을 따라 내 자리를 쓱 훑어보았다. 방금 막 붙인 엽서를 포함해 이것저것 카드와 그림을 붙여놓은 파티션은 알록달록하다. 그림은 부러 신경 써 고른 작은 네모 자석과 동그란 스마일 모양의 자석으로 붙여놓고 옆엔 스누피 자석도 하나. 갤러리 열듯 그림 배치도 신경 써서 붙이고 계절 따라 기분 따라 교체도 한다는 걸 팀장님이 아실까 몰라.
양쪽 파티션 사이의 작은 책상도 상황은 비슷했다. 내돈내산 동그란 키캡의 키보드, 빨간색 마우스와 서커스보이밴드의 마우스패드. 겨울이라 토끼가 붙은 가습기, 회사에서 나눠준 건 치워버리고 마음에 드는 걸로 새로 산 캘린더, 그 옆엔 일력, 내 강아지를 닮은 조그만 밀루 피규어…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다. 기를 쓰고 이 옥색 파티션과 황토색 책상을 내식대로 꾸며보려던 스물다섯의 내가 팀장님 눈에는 그렇게 보였나 보다. 회사에 정을 붙이려고 노력하는 걸로.
글쎄, 완전히 틀린 설명은 아니었지 싶다. 난생처음 만나는 사람들 속 황량한 내 책상을 ‘내 자리’로 느끼기 위해 나는 내게 제일 익숙한 일을 시작했던 거니까. 뭘 자꾸 주섬주섬 사모으고 갖다 붙이는 내가 팀장님 눈엔 이상한 다람쥐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말이지. 삭막한 사무실 한가운데, 다 비슷비슷한 파티션 사이에서 내 알록달록한 자리가 유난히 눈에 띄긴 했을 테다.
신입사원 때의 나는 팀장님의 말 한마디 한 마디를 기민하게 받아들였지만 이 부분에 있어선 모르쇠로 일관했고, 내 자리는 점점 더 다채로워지기만 했다. 사무실의 맥시멀리스트로 이름나는 건 금방이었다. 사람들은 종종 뭘 빌리거나 받으러 나를 찾아왔다. 넌 왜 이것도 있어? 감탄하는 듯, 그러나 의아해하면서.
그 뒤로 두 번의 이직. 그간 사무실에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구분하는 데는 도가 텄고, 이것저것 사보고 써보던 처음관 달리 정착템들도 몇 개 생겼다. 여러모로 더 업그레이드되기도 했고. 하여간 모든 걸 처음부터 시작할 필요 없이 기존에 쓰던 걸 왕창 들고 가기만 하면 되니 이른바 ‘정을 붙이는 일’은 더 간단해졌다. 두 번째 회사에서도 맥시멀리스트로 이름이 나서 ‘퇴사 날 이삿짐센터 불러야 하는 거 아니냐’는 농담도 하고 그랬다. 차를 끌고 가서 두 번에 걸쳐 짐을 날랐으니 영 없는 말도 아니었고. 하여간 시험 삼아 여러 번 바꿔보고 이걸 가져갔다가 저걸 뺐다가 하던 처음과는 달라서, 그걸 고대로 가져와 집에 쌓아뒀다가 세 번째 회사에 고대로 퍼 나르기 시작했다. 일명 나만의 사무실 키트랄까.
그래서 이번 회사에 정을 붙이는 일은 훨씬 쉬웠다. 입사 첫날부터 가방에 한 두 개씩 나의 아이템들을 챙겨 넣기 시작했으니까. 파티션이 없어 내 파꾸(파티션 꾸미기) 욕망을 채워주지 못했던 두 번째 회사완 달리 새 회사에는 다시 파티션이 있다! 것도 첫 회사처럼 누리끼리한 옥색이 아니라 화이트&그레이로 아주 깔끔한 파티션이! 쾌재를 부른 나는 예전에 쓰던 자석들을 다시 꺼내 들었다. 오랜만이야 얘들아.
내 최애 엽서들은 이미 대부분 내 방 벽에 붙어있지만, 그새 새로 모은 것들을 꼼꼼히 살펴 엽서도 챙겼다. 아끼는 제로퍼제로의 Dad&Daughter 시리즈 중 하나, 헤르메온느가 폴리주스를 만드는 장면의 스틸컷 엽서 하나, 늘 붙여두었다가 필요할 땐 바로 카드로 써서 선물하는 동그란 얼굴 모양 카드 하나. 거기에 친구가 생일선물로 준 포토프린터로 내 강아지 사진을 잔뜩 뽑아 그것도 챙겼다. 이 정도는 붙여줘야 꼭 내 자리 같지 암. 첫날이었는데도 어색함이 없었다.
그 뒤로도 일주일 동안 나는 몰래몰래 짐을 나르느라 바빴다. 아니 물론 일에도 적응을 해야 하지만, 일단 세팅을 싹 끝내야 일도 되는 법이니. 16년부터 쓰던 토끼 가습기와 메모리폼 등받이 쿠션, 최근 추가된 듀오백 발 받침대와 퍼플 방석을 다 가져다 놓느라고 주말에는 차도 한번 동원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가득 찬 내 자리를 보고 옆 자리 선배가 “소화님… 저 못지않은 맥시멀 리스트셨군요.” 하고 반가워했다. 맞아요, 제가 바로 이 사무실의 맥시멀 리스트입니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고요. 저는 이 정도는 깔아 둬야 일이 되니까 뭐라 하지 말아 주세요.
사회생활 7년 차, 어째 업무 스킬보단 이쪽 스킬이 더 빠르게 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내 책상은 여기서 3년 일한 선배의 책상보다도 안락하고, 뭐든 필요할 때 굳이 찾으러 나설 필요 없을 만큼 잘 갖춰져 있다. 엽서와 사진과 작은 피규어로 인테리어(?)도 놓치지 않았다. 일이나 할 것이지 쓸데없는 데다 에너지 쓴다 싶을 수도 있겠지만 모르시는 말씀. 손에 익고 눈에 익은 것들로 빠르게 업무 환경 세팅을 마쳤으니 이젠 정말 일에만 집중할 수 있다고. 뭐 찾느라 두리번거리거나 뻘쭘하게 헤맬 일도 없고.
덕분에 새 회사 적응은 그 누구보다 빨랐다고 자부한다. 그거면 됐지. 앞으로 어딜 가든 봇짐 하나 짊어지고 가 풀어놓으면 바로 내 사무실이 될 테고. 맥시멀리스트는 이렇게 점점 진화하여 새로운 형태의 노마드가 된다. 언제고 다시 이직한대도 일주일 안에 사무실을 내 집처럼 만들 수 있는.
자, 세팅은 끝났다. 이제 일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