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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i 사이 Nov 13. 2024

어쩌면 우리는 서로를 가스라이팅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아름답다 하는 것들도 과유불급인 것에 관하여.

누군가를 강렬하게 믿고 따랐던 경험은 진심을 다했기에 영혼에 남는다. 

그것이 결코 긍정적인 경험만이 아니었다 해도 말이다.



 지난번 '강아지를 좋아했던 소시오패스'에 불과했던 그녀에 대한 글을 쓴 바가 있다. 겨우 3개월도 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존중하고 따랐던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한 사실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어릴 적부터 어떤 사람에든 배울 점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고, 특히 나보다는 경험 많고 조금 더 오랜 시간을 삶에 투자한 사람이라면 더욱이 그랬다. 하지만 반사회적 인격장애라 불리는 소시오패스라니, 본인도 알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순수히 일과 강아지를 사랑했을 뿐이고, 어쩌면 나도 아끼던 후배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결코 그녀도 후배에 대한 사랑이 위험한 방식이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라는 박애주의자의 안일한 생각일까, 혹은 아직도 그녀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지 않은 채 마음 한편에 남아있는 것일까? 하지만 자신의 사업을 일으키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 '명의'를 지속적으로 내게 요구한 것을 보았을 때 내게 안전하지 만은 않았던 것이다. 내가 받고 있는 아찔한 애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던 나날에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전한 편지 구절을 인용해 다시 스스로를 깨워본다.

 

저는 세상을 너무 아름답게만 바라봤나 봐요.  그건 누군가 제 우산이 되어주어서였거나, 혹은 제가 그렇게 바라보고 싶었던 강한 마음 때문이었나 보죠.

...

꼭 그렇게 했야만 했는지 저는 참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그런 마음은 접어두고 이 사람과 맞서 싸워야겠다는 생각으로 정신을 무장했어요.

 

 단발머리가 거지존에 다다른 어느 날 나는 스스로 머리를 잘랐었다. 타인과 어떻게 싸우는지 익숙하지도 못해 누구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는 방식을 찾아낸 것이다. 그 주쯤 봤던 영화가 영감이 되기도 했다. 증국상 감독의 <소년 시절의 너>에서 주동우 배우가 연기한 '천니엔'이라는 인물이 극 중 학교폭력을 당한 뒤에 머리를 깎는 장면이 있다. 피해를 당한 여학생이 머리를 밀고 학원에 나타나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지만, 개의치 않고 공부에만 열중하는 모습이 더 단단해 보이고 어찌 보면 무서워서 영화를 보는 나도 압도당했다. 


(사진 출처 - 핀터레스트)


 머리를 자르러 갈 시간조차 부족해 내 손으로 직접 똑. 자른 머리를 보고 주변 사람들은 '예쁘다', '잘 어울린다' 말해줬는데... 그날 내게 헐레벌떡 오더니 나를 붙잡고 그녀는 '머리 왜 잘랐어요?'라고 물었다. 아마도 바쁜 시간에 혼자 다녀온 미용실이 신경이 쓰였던 것일까. 아니면 정말 궁금했던 것일까. 나는 한 마디, 아니 한 단어에 불과한 말만 던지고는 더 이상 그녀와의 대화를 오래 끌지 않고 시선을 돌렸다.


더러워서요.

  내 머리가 더럽기도, 사실 그 사람의 행동거지가 불쾌하고 추잡해 보여 던진 말이었다. 한 때 매니저를 했고, 프로젝트를 리딩했던 사람이, 하루하루가 바쁜 상황에서 내 머리가 잘린 궁금증을 표하는 이유가 과연 무엇인지 납득하기 어려웠다. 알고 싶지도 않았고. 앞으로 내가 책임져야 할 과제에 집중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날 이후, 한동안 그 누구도 믿기 어려웠다. 분명히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인데 가족도, 친구도, 애인도 모두 나를 이용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고는 온 세상에 반항을 해대는 싸움닭처럼 눈을 부릅뜨고 상대의 말에 어떤 논리적 허점이 있는지, 그는 틀리고 나는 왜 맞는지를 강력하게 토해내고 다녔다. 정말 구역질이 나는 일이었다.


 인간의 이기심이 훤히 보이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대학시절 너무도 좋아했던 친구에게 '너, 너무 이기적이다'라는 말을 듣고는 충격을 먹고 몇 년간 이타적으로 살기 위해 노력했던 나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스스로를 '맞아,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이고 나 조차도 누군가에게 ㅆㄴ(나쁜 여인) 일 수 있지'라는 설득을 해가면서 우울함과 외로움을 뒤로했던 시간들도. 그것들이 한데 뭉쳐 자기만 생각하는 인간들에 대한 원망이 자리 잡았다. 그 누구도 믿지 못하고, 믿기 싫었던 마음이 시작되었다.



 나를 이기적이라 말한 친구가 친했을 때 나를 위해 보내줬던 이미지, 5번이 핵심이다. 그렇다, 그때도 그리고 여전히 나는 누군가에게 ㅆㄴ 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존재였다. (사진 출처 - 핀터레스트)


 지금 돌아보면 그것들은 너무 고단했던 사건을 견디고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지키려는 허술한 방패막이였다. 방어기제를 마구 부리는 동안에 나의 가까이 있던 주변 사람들에겐 상처가 되었을지도, 혹은 애달픈 걱정거리가 되었다는 것을 지나고 깨달았다. 

 

 하지만 정말로 알아챈 사실은, 자기중심적 사고를 타고난 우리들은 무의식에 타인을 나와 비슷하게 만들어가며 편리한 대인관계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조차도 '우리 너무 비슷하지 않아?'라는 말을 남발하며, 다름을 인정하는 척 사실은 공통분모를 찾은 뒤 유대감을 형성하고는 내가 바라는 방향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의 본질적 개성을 잃기 가장 쉬운 짓을 평소에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앞서 인용한 편지의 내용에 이런 글도 있었다.


나는 강인한 걸까, 단단한 걸까? 
아니면 나도 그 사람들처럼 나도 이기적인 걸까.
머릿속에 드는 온갖 생각을 지워내려 노력하고 지내고 있어요.


 갈수록 경계심은 늘어만 갔고, 이제는 타인의 이기심과 연대감 사이에서 외줄 타기를 하고 있는 기분이다. 그게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는 게 내가 갈 외길 인생을 찾았다는 것과 다름없어서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결국 혼자일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이고 내 갈길을 가겠다 마인드를 드디어 장착했다는 것이다. 누가 알 일인가, 이러다가 나도 모르게 외줄 타기 전문가로 무형문화재가 될지~


 



 그럼에도 이 세상에는 닮아가더라도 안전한 사람이 있음에 안식한다. 온라인상에서 혹은 주변에서 '손민수'라는 말이 흔히 쓰일 때가 있는데, 여전히 거울처럼 닮고 싶은 사람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음을 인지한다. 조금 더 찾기가 어려워졌을 뿐이지 그들을 동경하고 따를수록 내가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은 팩트다. (사실 더하기 사실, 더 나은 단어가 찾기 어려울 정도의 강조를 하고 싶다.)


 고독한 박애주의자가 되기로 마음을 다잡고 있는 요즘 읽고 있는 책 「사랑은 고독한 것 - 박목월 에세이집」에 있는 구 절로 누군가가와의 애정라이팅 혹은 긍정라이팅을 주고받을 앞으로를 소망하며 마무리하고 싶다.


사랑이란 이처럼 고독하고 불안하고 열중하는 체험세계를 거쳐 비로소 상대자를 발견하고 그와 진실한 생명적인 관계를 획득하게 된다. - 35p


 이 글은 애인(사랑하는 사람)에게 적용하라는 의도로 작성되었긴 하였다만, 주변 친구 혹은 나아가 내가 맺는 모든 관계에 대해 해당할 수 있는 것으로 해석하여 발췌했다. 어떤 상처에도 굴하지 않고 만인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오늘도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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