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식 Feb 15. 2024

밸런타인데이에는 건강검진을-

20240214 mri 금식 없음


팬티를 제외한 모든 옷을 벗고 주는 옷으로 갈아입는다. 귀걸이 목걸이 반지 시계 등 모든 액세서리류를 탈착 한다. 마스크도 제공해 주는 것으로 바꿔한다.

슬리퍼로 갈아 신는다.

사물함에 소지품을 넣고 네 자리 숫자를 누르면 잠긴다.

화장실에 다녀온다.

주삿바늘을 손등에 꽂고 조영제를 조금 넣어 알레르기 테스트를 한다.



- 괜찮으세요?

- 네. 차가워요.



차가운 무언가가 혈관을 따라 손목과 팔꿈치 중간까지 들어왔다. 간호사를 따라 검사실로 들어간다.

하얗고 거대한 터널 아래에 누울 수 있는 기다란 받침대가 뻗어 있고 받침대 위에는 공룡 뼈 모형처럼 생긴 기구가 올려져 있다. 심신의 안정을 위해 티라노 같은 육식공룡보다는 둘리 엄마인 브라키오 사우르스 같다고 생각하기로 한다. 신발을 벗고 앞섶을 풀고 둘리 엄마 위로 눕는다. 둘리 엄마는 내가 엎드린 자세를 오래 유지해도 불편하지 않도록 딱딱한 받침대 위로 곡선모양의 지지대를 만들어 무릎을 살짝 구부리고 상체를 둥글게 기대어 누울 수 있도록 해주었고 얼굴과 가슴 부분에는 구멍을 뚫어 불편함을 최소화하는 친절을 베풀어 주었다.

40분 동안 움직일 수 없으니 최대한 편한 자세를 잡는다.

간호사 선생님이 이마에 부직포 베개를 대주고 몸을 조금씩 움직여 더 편한 자세를 잡아주며 괜찮은지 여러 번 묻는다. 이름과 생년월일을 확인하고 액세서리 착용여부를 재확인한다. 귀마개와 헤드폰을 이중으로 씌워주고 마지막으로 손에 비상벨을 쥐어 주었다.



- 너무 힘드시거나 하면 비상시에 누르세요. 그 외에는 절대로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숨도 크게 쉬면 안 되고 작게 일정한 간격으로 쉬세요. 무슨 말인지 아시죠?

- 네.

- 많이 시끄럽습니다.

- 네.

- 중간에 조영제 들어갈 거예요. 놀라지 마세요.

- 네.

- 시작합니다.



엎드린 채 둘리엄마의 품 속에 얼굴을 넣고 한 대답이 들렸을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둘리 엄마와 나를 태운 받침대는 이미 터널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삐- 삐- 두두두두두-


지하철 경보음보다 만 배는 큰 것 같은 소음과 한겨울에 얼어붙은 땅을 뚫는 굴착기 소음이 동시에 시작된다. 숨을 일정하고 작게 쉬라고 하셨는데 순식간에 심장이 빠르게 뛰면서 숨이 가빠진다. 하지만 나는 mri 유경험자이다. 벌써 3? 4? 번째라구우. 어떤 생각을 해야 기분이 나아질지 알고 있다.


떠올린다. 내가 좋아하는 것.


지난번에 유용했던 좋아하는 아이돌 생각은 어쩐지 오늘 통하지 않는다.

두 번째로 넘어간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인테리어 공사 중에 제일 시끄럽다는 화장실 타일 철거 소음이 쏟아지는 중이라 얼른 기분 좋아지는 상상을 해야 하는데.


얼마 전에 본 웡카가 떠오른다.

지금은 티모시가 컴 위드 미 하는 장면이 먼저 떠오르지만 통 안에서는 휴 그랜트가 네가 내 카카오를 훔쳐갔다며 비난했다. 벌건 얼굴에 초록 머리로 화를 내도 이토록 기품 있고 매력적이라니. 발음은 또 어떻고.

잠깐 소음을 잊었지만 곧 다시 시작된다.

이번엔 좋게 말해 새벽에 문 닫힌 클럽 앞에서 들리는 소음이다.  쿵쿵 거리며 울리는 EDM 음악 같기도 엄청 큰 엠씨스퀘어 소리 같기도 하다. 어디선가 젖은 공기 속에 담배연기가 실려올 것 같아 속이 울렁거린다. 다른 생각을 하자.

저녁에 약속이 있다. 멀리 사는 친구들이 놀러 오기로 했다. 동네 맛집 투어를 해줄 예정이다. 이따 뭐 먹지?

배시시 웃음이 지어진다. 아 움직이면 안 되는데.

오늘 소음에서 벗어나는 제일 유용한 생각은 이따 뭐 먹지로 결정됐다. 친구들과 마주 앉아 여기 맛있지? 이거 맛있지? 하며 깔깔거릴 생각만으로 조금 행복해진다.

회와 성게알을 떠올리고 있는데 주사 바늘을 꽂은 팔이 저려온다. 손가락을 움직여보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니 힘이 들어가는지만 살짝 확인해 본다. 그 정도는 되지 않을까. 한 번만.

팔에 점점 더 감각이 없어지는데 선생님이 조영제를 투여한다. 혈관이 눌려서 팔이 저린데 조영제가 잘 퍼질까? 잘 안 퍼져서 촬영이 잘 안 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을 잠깐 한다. 선생님이 알아서 해주겠지. 여기는 의료강국의 대학병원이니까.

인테리어 공사 현장과 한겨울의 건설 현장과 지하철 승강장과 새벽녘 클럽 앞을 몇 차례 끌려 다니고 이제 끝났으면 좋겠다 싶은 마음을 견디며 항구의 뱃고동 소리와 전투기 소리를 몇 번 듣고 나면 검사가 끝난다.


둘리 엄마의 품에서 몸을 일으켜 앞섶을 여민다. 선생님이 주삿바늘을 빼주신다. 대기실에 앉아 티비를 보며 5분간 지혈해야 한다. 4분이 지났다. 피가 멎었나 확인한다. 멎었다. 입고 간 내 옷으로 갈아입는다. 부직포베개 자국이 이마와 양쪽 볼에 선명하다. 모자 가져올걸. 이 얼굴로 어떻게 나가지. 탈의실은 1인용이고 한 개뿐이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나가야 한다. 인사를 하고 나온다. MRI실 옆의 Pet/CT실을 지나며 속으로 내일은 꼭 모자를 챙겨 와야지 각오를 다진다.


작가의 이전글 우울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