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잘 쓰고 싶고 잘 보이고 싶고 있는 척하고 싶은데 자신이 없었다. 참여하고 있는 온라인 글쓰기 모임에 일본에 다녀온 이야기를 연재하다가 나 혼자 지쳐서 일주일 넘게 글을 쓰지 못했다. 바쁜 건 핑계고 멋져 보이려다가 그냥 스스로 망한 것이다. 다음은 할 얘기가 도무지 없는데, 글쓰기 모임 참여자로서 참가의 예를 갖추기 위해 작성한 망했다는 고백서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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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얘기나 써야지. 하찮고 보잘것없고 실망스럽고 남들이 비웃을만한 글을 써서 올려야지. 실패해야지. 쫄딱 망해야지. 단어 하나도 쉼표도 띄어쓰기조차 재미없어야지. 마침표마저 지루해서 한숨이 나오게 만들어야지. 이 글을 읽는 데 쓴 짧은 시간도 아까워야지. 망신당해야지. 다시는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리기도 민망할 욕을 들어먹을 글을 써야지. 쓸데없는 얘기를 해야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이야기를 써야지. 읽기도 민망할 창피한 일상만 골라서 보여줘야지.
오늘 아침, 잠에서 깼지만, 침대에서 일어나기 싫었다. 침대에서 일어났지만, 아이를 깨우기 싫었다. 아이를 깨웠지만 아침을 차리기 싫었다. 어제저녁에 끓여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져 있는 미역국을 데웠다. 아이를 늦게 깨운 탓에 밥 먹을 시간이 없을 것 같았다. 아이가 밥 대신 사과를 먹겠다고 했다. 어제 택배로 온 청송사과를 꺼냈다. 마트 사과보다 비쌌지만, 알이 크고 색이 예쁘고 단단해서 그럴 가치가 느껴졌다. 사과껍질이 부드럽게 깎이고 곡면 위로 칼날이 지나가는 소리가 빙판 위를 가르는 스케이팅 소리처럼 경쾌했다. 난 지금 사과를 깎는 게 아니라 행위예술을 하는 거야. 떨어지는 사과껍질이 싱크대에 닿지 않게 음식물 쓰레기 봉지 안으로 떨어지도록 자리를 옮기면서 스케이트 타듯 실내 슬리퍼로 바닥을 밀었다. 사과에 땅콩버터를 올리려다가 아이가 ‘땅콩버터는 맛있지만 별로 내 스타일은 아닌 거 같아’라고 한 말이 생각났다. 완곡한 거절. 아이는 거절을 그런 식으로 한다. 상대방이 기분 나쁘지 않게 조심스럽게. 예민하고 까칠한 엄마에게 자라서 눈치 보는 아이가 되어버린 이유도 있을 거다.
유산균과 활성엽산과 프테로스틸벤을 먹었다. 영양제를 먹은 후 적어도 삼십 분은 지난 뒤에 커피를 마셔야 영양제가 흡수된다고 해서 아침 영양제는 최대한 빨리 챙겨 먹는다. 곧 커피가 마시고 싶어질 테니까. 칼슘과 마그네슘을 오래 챙겨 먹은 부작용으로 요즘은 유산균만으로는 화장실을 쉽게 갈 수 없다. 요거트도 먹어야 한다. 하루 종일 처먹는 일에 관한 생각뿐이다.
더 지루한 얘기는 없을 거 같지만 사실 있다. 세상엔 지루한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원주율을 읊어보자.
3.14
다음은 모름. 소수점 두 자리에서 원주율을 정한 건 계산의 편리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 자리는 더 지루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쓸모없는 얘기는 한 번만 해야 효과가 있고 이런 식의 자기 비하도 마찬가지다. 이 글로 인해 다음 글을 쓰는데 화수분이 되거나, 누군가는 내가 재치 있다고 여길 거라는 의도도 있었지만, 이것도 사실 써먹은 적이 있다. 그러니까 이제 난 완전히 망했다. 커피나 마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