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계절을 보지 않고 살았다.
달도 별도 바람도 비도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 위에 해만이 군림하듯 무덥기만 날들을
절기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나무가 자랄 때마다
알록달록 단풍색의 팔토시를 끼고
눈만 겨우 보이는 마스크를 쓴 분들이 나타나
가장 연한 가지부터 베어냈다.
커다란 잎사귀들이 그늘을 만들어 줄 가지도
가을이면 노란 단풍을 보게 해 줄 가지도
겨울에 까치밥이 될 감이 열릴 가지도 모두 잘라내
다음 계절은 없다고
이 뜨겁기만 한 날들이 영원할 거라고 알려주는 듯했다.
나무 그림자조차 앙상한,
해바라기마저 해에게서 등 돌리는
재앙 같은 날들이었다.
싱크대 수전의 손잡이를 가장 왼쪽으로 돌려도
차가운 물이 나오지 않았다.
파란 바다도 뜨겁고
불어오는 바람도 뜨겁고
파도를 움직이는 힘이 센 달도 낮동안의 더위를 식히지 못했다.
고온다습한 더위에 지쳐 녹아내리는 정신에도
이 시절을 푸르른 여름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소낙비와 구름과 햇살과 하늘과 그림자를 얘기하는 대신
가장 뜨거운 밤, 가장 긴 더위, 가장 무더운 날에 대한 기록들만 쌓여가는 나날을
여름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았다.
역대 가장 더웠던 추석이 지나고 나서야 비가 내렸다.
온종일 비가 내리더니, 차가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멈춰있던 시간이 드디어 흘러 계절이 바뀌는데 필요한 시간은
딱 하루였다.
문을 열자 다른 세상에 도착한 듯
세상의 주인이 바뀌는 시간.
드디어 해의 독재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