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빛나는달과별 Dec 22. 2018

따뜻한 어둠에 물든, 순백색 겨울을 닮은 누나에게

[너에게 전하는 편지 v번외3] by 고려대학교 대나무숲



* 이 글은 제가 저장하고 싶어 올리는 글입니다. 원래 글은 고려대학교 대나무숲에 2018년 12월 12일에 게재되었습니다. 저작권도 작성자가 갖고 있습니다. 



#41447번째포효

안녕, 빛을 잃었지만 누구보다도 하얀 미소를 가지고 있었던 누나. 요즘 정말 날씨가 많이 추운 것 같아. 사람들은 모두 자신을 꽁꽁 싸맨 채로 길거리를 걸어가고 있어. 자신만의 비밀을 한 개씩 마음속에 품고 걸어가는 사람들은 은밀하기에 아름다운 걸까? 눈이라는 것을 우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언젠간 사라진다는 것을 알기에, 그 순간밖에 볼 수 없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생각하는지도 몰라.

다람쥐길에서의 우리 이야기는 이제 더 이상 우리 둘만의 이야기가 아니게 됐어. 내가 주절주절 떠들어 버렸으니까 말이야.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 우리 둘만의 이야기는 은근하기에 아름다웠고, 찰나의 순간이 내 추억 속, 그리고 누나의 기억 속에서 숨 쉬고 있었기에 반짝거렸을 거야. 하지만 반짝거림은 점점 옅어질 것이고, 계절이 하나하나 죽어갈수록 퇴색되겠지.

누나가 떠나간 그 겨울, 사람들의 발자국으로 얼룩진 눈으로 눈사람을 만들어 봤어. 그런데 사람들의 일상으로 얼룩진 눈으로는 누나를 닮은 눈사람을 만들 수 없더라고. 우리 둘의 추억에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는 순간, 점점 그 색깔이 희미해지더라고. 누나의 얼굴을 생각하며 어떻게든 조각을 해보려 해도, 누나의 형상은 윤곽이 잘 드러나지 않더라고. 그때만큼은 피그말리온이 되고 싶었어. 자신의 조각을 보고 사랑에 빠진 조각가 말이야. 이때만큼은 내가 조각가가 되고 싶었고, 누나라는 조각을 만들어서 사랑에 다시 빠져보고 싶었어.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걸, 나는 손재주도, 미적 감각도 없는 그저 그런 평범한 학생일 뿐이니까.

그때 누나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누나의 하늘도 내 하늘처럼 금이 갔을까? 난 누나의 하늘에도 금이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게 우리가 같은 하늘 아래서 숨을 쉬고 있었다는 증거고, 우리가 함께 하얀 풍경을 보았다는 증거겠지. 다람쥐길에서 누나의 손이 내 손과 맞닿았었다는 증거일 테고, 우리의 단어들이 서로에게 닿았다는 증거겠지.

누나한테 '나, 그 후 일 년 동안 잘 지냈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아. 바보 같아 보이고, 너무나도 이기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난 전혀 잘 지내지 못했거든. 일상을 보내다가도 불현듯 생각나는 순간에는 아파했고, 잊으려고 노력할수록 은은했던 추억이 선명해졌으니까. 결국 나는 누나를 그리워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아. 며칠 전 글을 쓸 때 조차도.

정말 미워해.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누나를 미워해. 나라는 사람을 변화시키고, 많은 것을 가르쳐준 누나를 미워해. 이 말을 들은 누나의 하늘에 금이 누구라도 볼 수 있을 만큼 커져서, 우리가 함께했던 그때의 눈을 뿌려줄 정도로. 그때의 하얀 거짓말을 다시는 할 수 없도록, 다람쥐길에서 바라본 풍경을 우리의 손이 포개진 채로 영원히 볼 수 있도록.

내가 글을 쓰는 것도 마지막이 될 거야. 주저리주저리 길게 우리의 이야기를 쓰는 것도, 누나를 향한 그리움의 언어들을 넌지시 던지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일 거야. 못다한 누나와 나의 이야기는 동화처럼 남아있어야 하고, 누구도 믿지 않는 은밀한 이야기가 되어야 하니까. 나조차도 있었다고 믿을 수 없지만, 어쩔 수 없이 내 안에 영원히 남아있을 이야기니까.

따뜻한 어둠에 물든, 순백색 겨울을 닮은 누나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