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기 객관화
처음 글쓰기를 할 때 나는 스스로를 감추지 않았다. 당시만 하더라도 정신과는 몰래 다니는 게 당연했고 인터넷에 사사로운 개인사를 늘어놓는 분위기가 아니었지만, 어릴 적 트라우마부터 개인 연애사까지 망설임 없이 업로드를 했다. 글쓰기가 치유라는 믿음도 있었다. 일종의 고해성사였던 셈이다. 블로그에서 브런치로 넘어온 후에도 사적인 글쓰기를 했다. 심연 속 수치심을 끄집어내어 브런치 북도 만들었다.
'아무개'의 아무런 일상 기록은 타인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스토리와 메시지가 없다면 더더욱 그렇다. 인플루언서의 발언이 언제나 창의적이고 깊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똥맛 카레와 카레맛 똥 중 무엇을 먹을 거냐는 질문은 어떠한 철학도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사람'이 어떤 대답을 하는지 궁금해서 찾아 읽는다. 나는 명확하게 전자였다. 작년 말 브런치 북을 삭제했다.
으스대고 싶지는 않지만 일부 브런치 글에서 과거의 나를 보곤 한다. "늦잠을 자서 점심을 많이 먹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우울한 날이다." 낯선 이의 신세한탄과 감정기복은 흥미를 유발하기 어렵다. 짝사랑하는 여자의 남동생 일기를 훔쳐보는 느낌이었다. 내 글을 읽은 사람도 같은 감정이었을 것이다. 뒤늦은 깨달음은 아팠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사적인 글쓰기를 중단하고 독서를 시작했다.
저 문구를 처음 봤을 때에는 자유를 억압하는 주장처럼 보여서 불쾌했다. 받아들이는 데에 많은 시간이 걸렸다. 도움이 안 되는 책은 없었다. 악역이 승리하는 결말은 있더라도 악에 굴복하는 작가는 없었다. 생각이 변하자 내가 썼던 사적인 글쓰기가 부끄러웠다. 나는 늘 부정적인 결말을 고수했다.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지만 우울은 전염될 뿐이었다.
"나는 틀렸어."
"우울하니 치킨이나 먹어야겠다."
"내 글은 아무도 안 읽어. 글쓰기 힘들다."
독서를 시작하며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글을 써보기로 했다. 나의 글을 읽고 정보와 영감을 얻은 사람이 누적되면, 비로소 나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생겨날 거라고. 사적인 글쓰기는 그때 해도 늦지 않는다. 억지 텐션으로 긍정왕이 되자든가 무턱대고 정보성 글을 쓰겠다는 계획이 아니다. 글이 읽히지 않는 이유를 적극적으로 분석하자는 다짐이다. 나의 경험은 보편적 공감을 얻어내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사적인 글쓰기의 핵심인 필력이 부족했다.
잘못된 꾸준함도 경계해야 했다. 수년간 사적인 글쓰기에 매몰됐던 이유는 꾸준함이 무엇이든 극복시켜 준다는 믿음이었다. 한 우물만 파라는 조언은 관련 분야 책을 다독하라는 뜻이지 책 하나를 반복해서 읽으라는 소리가 아니었다. 글쓰기는 정도가 없기 때문에 2~3년 동안 발전이 없더라도 의구심을 품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5년을 넘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믿기 어렵겠지만 나의 브런치 첫 글은 2018년도다.
노파심에 반복하는 말인데 이 글은 내가 사적인 글쓰기를 중단한 이유이지 개인의 이야기를 감추자는 주장이 아니다. 개인의 경험만큼 유니크한 글감은 없다. 이 글도 사적인 글쓰기를 고집하다 실패한 경험을 쓴 것이다. 어쨌든 자신의 글이 타인에게 도움이 되지 않고 부정적 메시지만 가득하다면 한번 즈음 돌아보자는 취지다. 요즘 들어 그런 글이 많이 보이는 것 같다. 감수성과 불평불만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