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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쏘쏘 Jul 18. 2019

유럽에서 갑자기 혼자가 되었다

스물여덟에 갑자기 유럽 9편 - 파리(프랑스), 잘츠부르크(오스트리아)

2019.07.05 파리(프랑스), 잘츠부르크(오스트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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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갑자기 혼자가 되었다


오늘 나는 느닷없이 유럽에서 독립을 한다. 두 동행이 한 달간의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간다. 혼자가 되기 하루 전부터 바싹 긴장해서는 급하게 이후 여행 동선도 짜고 이동해야 할 스위스행 버스표, 돌아가는 비행기표 예약을 했다. 이제 여행의 책임을 분담해줄 사람도, 머리 맞대 함께 고민할 사람도 없다. 오롯이 다 내 몫이다. 유럽이 정글로 둔갑했다. 과연 첫 배낭여행을 잘 해낼 수 있을까? 실감이 잘 안난다.


돌아가면 적응하는 일도 만만치 않을거야.


자기 여행도 적응 못해놓고 괜히 보내야 하는 이 아이를 걱정해본다. 올해 5월 베트남 여행을 다녀왔는데 간만에 휴양 목적으로 다녀온 여행이라 그런지 다녀오고 후유증이 꽤 쎘다. 흥청망청 먹고 놀다 복귀한 일상이 무의미하게 느껴져 제정신으로 돌아온다고 일주일은 헤멨지. 무려 한 달을 여행한 너의 복귀는 어떠려나. 사실 정말 걱정되서라기보다는 이렇게 우리가 떨어지는 이 순간 내가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건 이 말뿐이었다.


조심히 잘 하고.
특히 친절한 남자를 조심해야 해.


키득키득. 내가 친절한 남자애 약한 건 또 어떻게 안거야.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너의 예쁜 눈망울을 이제 2주나 못 본다는게 싫어. 새벽 6시, 산책에 응한 너도 같은 마음일까. 마지막이니까 또 다른 파리의 거리다.


파리지앵들은 시계를 안 보고 사는지 아침 6시부터 바쁘다. 시간이 안갔으면 좋겠지만 누군가는 빵을 굽기 시작하고 누군가는 신문을 읽고 누군가는 청소를 하며 아침이 밝아온다. 그렇게 방금 카페에 앉았는데 7시다. 이 핸드폰을 꺼버리면 시간도 꺼질까. 정없는 인천행 비행기는 제 시간에 떠나겠지. 우리, 이제 우리에서 각자로 돌아가야 해.

마지막까지 험난했던 샤를 드 골 공항가는 길, 인도가 없다


Do you have a candle?


샤를 드 골 공항에서 멍하니 비행기를 기다리는 두 동행과 다르게 갑자기 혼자 바쁘다. 두리번 두리번. 빵집이 어딨지. 파리에 그렇게 널려있던 케이크가 이 넓은 공항에 단 한 개도 없다. 아쉽지만 머핀, 너가 대타 뛰어야겠다. 케이크도 없는데 초는 당연히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카페마다 눈을 빛내며 간절하게 물어봤지만 역시나 없다.


생일 축하해.


함께 보내려고 굳이 생일에 귀국일정을 잡은 그 아이와 한국에서 기다리고 있는 우리 캐리커처가 박힌 그 아이 선물에게 미안하게도, 난 그 아이의 생일날 어쩌다보니 스위스에 있게 됐다. 그치만 하루 일찍이라도 네 생일은 꼭 축하해주고 싶었어. 생일이라는 핑계로 너가 한번 더 행복했으면 좋겠으니까. 물론 기념품 사다 비행기 체크인 시간을 놓쳐 결국 8시간 기다려 다음 비행기를 타게 된 이 분위기에 시끌벅적한 생일파티를 해줄 수는 없었다만.

일주일간 배낭 속에서 유럽여행을 했던 케이크용 문구


함께해서 좋았다.
상주에도 놀러오렴.


남자친구 아버지와 악수를 하는데 왜 울컥한 걸까. 다신 없을 아들과의 여행에 껴든 불청객을 서스럼없이 책임져주신 그 마음의 크기가 갑자기 실감이 나서 였을까. 감사한 마음이 내 몸에 담을 수 없을 정도인데 한번이라도 못 꺼내본게 아쉬워서 였을까. 잘 모르는 사람들이야 남자친구랑만 가면 더 좋았겠다고 얘기하겠지만 남자친구 아버지가 없었다면 이 7일은 그저 수많은 휴가 중에 하나였을 거다. 어른이란 이유로, 젊다는 이유로 기댈 곳이란 세 사람뿐인 유럽에서 서로를 자기보다 아끼고 챙겼던 7일간의 동행은 내 생에 빛나는 에펠탑보다 다시 만나기 힘들 예정이다.

아버님 감사해요! 빨리 상주갈게요, 히히


혼자서도 분명 잘 할거야.


아쉬운 마음은 감추고 나를 응원하는 어른스러운 네 마음이 스위스행 버스를 타러 가는 나를 입구까지 데려다준다. 2019년 여름, 마드리드에서 파리까지 우리 함께한 유럽이 끝났구나. 진짜 끝이 되니까 아리아리한 가슴 통증이 올라온다. 사실 있지. 너가 날 데려다 줬던 3월 25일 처음 영화 본 그날부터 파리 지하철 개찰구 앞까지 데려다 주는 지금까지, 한번도 아쉽지 않은 날이 없었어. 나만큼 아쉬워하는 너의 눈동자가 모르핀이 돼줘서 견딜만 했을 뿐이야. 2주 후엔 더 재밌는거 하자. 안녕.

추억 가득가득 했던 파리야, 안녕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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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생에 나홀로 여행은 처음이라


히유.


크게 숨을 내쉬어본다. 함께 한다는 건 든든하지만 긴장되는 일이었다. 이제 혼자다. 긴장이 풀린다. 그러나 이젠 믿을 뇌가 딱 하나뿐이다. 쉼호흡한지 1분도 안되어 다시 바짝 기합이 들어간다.


'클리쉬 거리 역에서 내려서 10분 걸으면 버스 정류장 도착이고, 버스 출발 시간은 5시 15분.'


다섯번이나 확인한 걸 또 확인한다. 내 기억은, 내 눈은 믿을게 못되니까.

어제까지 정든 파리가 갑자기 낯설다. 즐기는 여행은 오늘로 끝났다. 이제부터 생존을 위한 여행이다. 다부지게 마음먹고 스위스행 버스를 타러 버스 터미널로 가는데 아무리 가도 입구가 보이지 않는다. 이럴 때 너가 있었다면 잠깐 기다리라며 달려가서 먼저 입구를 찾아줬을텐데. 근데 너 그거 아니.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보다 안심하라는 네 웃음이 더 든든했다는거.

지하 동굴처럼 생긴 입구에 버스들을 뚫고 들어가 수십개 넘는 터미널에서 기어코 59번 터미널을 찾아 스위스행 Flix 버스를 찾아낸다. 난생 처음 타보는 이층 버스 맨 뒷자리에 둥지를 튼다. 지금은 오후 5시반. 약 12시간 후에 스위스 베른에 도착할 예정이다. 같이 있을 땐 버스 타는 것조차 여행이었는데 혼자서는 할 게 없다. 오랜만에 여행 후원자님들께 전화를 걸어본다.


글 잘 보고 있어!


여행 오기 전에 후원의 대가로 여행에서 얻는 걸 함께 나누기로 약속했다. 그래서 에세이를 매일매일 가족 카톡방에 공유했다. 엄마는 마드리드 편에 나오는 '하얀 얼굴과 동그란 눈도 그대로였다.'는 표현이 마음에 드신단다.

"이제 스위스 가고 있어."
"스위스? 융프라우 꼭 가봐."
"융프라우 비싼데..."
"돈 걱정 말고 가봐."

때때로 엄마아빠의 사랑을 받을 때면 내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싶다. 이렇게 사랑받을 만큼 예쁜 짓을 많이 하며 살아오지 않았는데 심장이 깔려 터질 것 같은 사랑을 받는다. 그 큰 사랑에 매달려 평생 애로 사는 거 아닌가 걱정하다가 그냥 마음껏 행복하기로 했다. 나도 언젠가 그런 사랑을 줄 아이를 만나겠지. 생각해보니 난 단 한번도 혼자였던 적이 없다.

딸바보 2명과 말없는 오라버니, 그리고 돈 많이 드는 캥거루의 카톡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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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난 동양에서 온 누나야


왼쪽 뺨이 근질근질하다. 고개를 돌려보니 두 눈이 얼굴의 반을 차지하는 애기다. 외계어로 조잘대는 동양 누나(아니, 이모인가)가 신기한지 입까지 벌리고 쳐다본다. 통화를 끊고 손 인사를 건넨다. 관심을 주니 순수한 애기가 개구쟁이로 서서히 변한다. 안녕, 난 동양에서 온 누나야.


How old is he?


두 살이란다. 이 버스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까지 가는 버스이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아기일 걸로 조심히 예측해본다.

'"어흥."
"꺄아앍아아앍! 크햙햙.. 헤헤헤"

잠깐 한국식으로 놀아줬더니 고함에 가까운 웃음소리로 고이 잠든 버스 승객들 40명을 다 깨운다. 죄송합니다. 함부로 놀아주는게 아니었는데요. 나도 독일어(오스트리아 공용어)를 못하고 너도 아직 말을 못하니 우리는 쿵짝이 잘 맞았다. 내가 만만해졌는지 이젠 날라차기까지 선보이다 엄마한테 궁디 싸대기를 맞는다. 괜히 민망해져선 자기 초콜렛 과자를 꼬물꼬물 건네준다. 치사하게 안에 초콜릿은 자기가 먹고 위에 있는 비스킷만.


바이바이.


수준 맞는 두 사람이 꽁냥꽁냥한지 한시간은 지났을까. 아기랑 엄마가 먼저 내린다. 예상보다 빠른 헤어짐에 아쉽다. 동양 누나랑 놀아줘서 고마워. 마침 자고 싶었는데 잘 됐다.

너의 발차기는 잊지 못할거야, 아팠거든ㅎㅎㅎㅎ


혼자 있으면 심심하고 같이 있으면 자고 싶다. 일상에서도 그러더니 여행 와서도 그런다. 돌아보면 혼자여서 행복했고 둘이라서 행복했다. 그래. 혼자다, 함께다도 그냥 생각이다. 언제나 혼자서 결정하고 책임져야 했고 언제나 남을 고려하고 남에게 영향을 받았었잖아. 혼자면서 함께인, 나는 피할 수 없게도 사회적 인간이다.

디글디글 사람들 눈치 보며 부대껴 제발 혼자가 되고 싶다고 뛰쳐 나온 수행공동체, 그 안에 같이 살던 사람들 얼굴이 잘츠부르크 거리 위에 뿅뿅 나타난다. 새벽에 화장실 갈 때 바스락거리는 소리에도 깨던 그 옆 사람들이 너무나 숨막혔다. 24시간 같이 살다 가족이 된 그 사람들의 가식없는 그 행동들이 너무나 재밌었다. 너무 싫었다. 너무 좋았다. 함께인 우리가, 혼자인 내가. 남자친구, 남자친구 아버지와 함께한 7일간의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고생했어.'

어두워진 잘츠부르크 거리 위로 들떴다가 괴로웠다가 정신없이, 하지만 열심히 살았던 이십대의 내가 보인다. 너가 고생한 덕에 지금은 그때보단 좀 덜 시달리며 살아.


이제 스물여덟의 내가 대답해야 할 때다. 세상에 잘 보이려 애쓰는 나랑 세상에 감사해하며 베푸는 나. 누구로 살아볼래? 쌩쌩 달려가는 독일어 간판들 위로 깊은 생각에 빠진 동양 여자애가 앉아있다.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을 만큼 안전하게 데려다 준 Flix 버스 쌩유!
도움이 될진 모르겠으나 유럽여행 상담이 항상 열려있습니다.
(카톡 ID : one1wa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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