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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쏘쏘 Jul 20. 2019

혼성 도미토리, 너라는 충격

스물여덟에 갑자기 유럽 10편 - 베른(스위스), 인터라켄(스위스)

2019.07.06 베른(스위스), 인터라켄(스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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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예쁨이 아닌 스위스 베른


5시 50분, 새벽과 아침 사이 스위스에 도착했다. 제정신은 아닌데 일단 내려야 돼서 내렸다.


대박.


듣는 사람도 없는데 놀라서 말을 해버렸다. 어머나, 말로만 듣던 알프스가 새벽부터 뚜벅뚜벅 다가오는 동양 여자애가 신기한지 빼꼼히 나를 쳐다본다. 안녕. 너가 그 유명한 만년설이니? 흰 정수리가 예쁘구나. 난 내일 너한테 갈 거란다. 알프스 산과 친해지니 베른의 예쁜 집들도 인사를 건넨다. 마드리드와 파리의 집들은 세월이 느껴지는 중세식 건물들이었든데 여긴 세모난 지붕의 앙증맞은 집들이 파란 들판 위에 늘어서있다. 걷다보면 종종 커다란 표지판에 언어가 4개씩 적혀 있는게 새롭다. '역시 관광대국!'이라고 생각했지만 네이버 왈 스위스는 공용어가 4개란다.

스위스의 예쁜 집들. 갖고 싶다, 너란 녀석


네이버 현지투어가 추천하는 올드타운으로 뚜벅뚜벅 걸었다. 베른에서 유명하다는 시계탑을 바라본다. 크게 감흥은 없지만 일단 유명한 곳은 사진을 남겨줘야지. 그때 내 소중한 셀카봉과 아이폰 위로 비가 한방울 떨어진다. 젖으니 그만 하라며 처량한 모습으로 주인을 바라보지만 사진에 발이 약간 잘렸다. 한번만 더 찍자, 애들아.

아이폰과 셀카봉이 다했다, 고생했다 애들아


마을을 껴안고 돌고 있는 예쁜 강과 아이컨택 좀 하다 베른 패키지투어에 꼭 포함돼있는 장미정원에 올라본다. 장미가 생각보다 별로 없다 싶을 때 돌아보니 세상에, 이 세상 예쁨이 아닌 전망이 눈에 들어왔다.

주변과 참 잘 어울리는 목조 지붕의 낮은 건물들과 곳곳에 뾰족뾰족 튀어나온 성당들이 가득한 베른, 그 베른을 섬처럼 안고 있는 아레강이 날씨 덕에 약간 신비로운 느낌으로 아른아른거린다. 이건 완전 동화다. 도시가 이렇게 단아할 수 있나. 무려 이 예쁜 도시가 정신없이 바쁠 한 국가의 수도라는게 더 충격. 단아한 그 도시는 그 강과 나무들이랑 세트로 태어난 것 같다. 안정적이다. 사람이 사는 곳이 이렇게 예쁠 수 있구나. 너무 예뻐서 내려가기 아쉽다.

저 강과 저 나무와 저 들판과 저 집들, 말잇못


내려가는 길에 아인슈타인 동상이 있어 친한 척 셀카를 남겨본다. 아인슈타인은 스위스 취리히 공과대학 출신으로 졸업 후 베른에 취직해 7년 정도 살았단다. 그 때 살았던 곳이 올드타운에 있는 아인슈타인 하우스인데 돈을 내야 되서 들어가보진 않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구글 박물관이 무료로 열려있으니까.


내가 만약 거울을 들고 빛의 속도로 움직인다면 거울 속에 내가 보일까?


이 의문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출발했단다. 물론 내가 문과생이긴 한데, 저게 도대체 왜 궁금한 거지. 3년 전인가,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고 너무 감동받아서 한동안 인터스텔라 해석만 계속 찾아봤었지만 결국 내 머리는 해석 못했었지. 다시 상대성이론을 검색해봐도 스압 쩐다. 이 생에는 이해 못할 듯 싶다.

곁에 있어도 뇌의 간극은 좁혀질 수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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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성 도미토리룸, 너라는 충격


혼자 여행의 최고 장점은 속성이다. 베른을 금새 둘러보고 융프라우 산악열차를 탈 수 있는 마을 인터라켄으로 향한다. 밤새 버스를 타서 머리가 떡이 됐는데 비까지 와서 내 몸을 어따 버리고 싶었지만 꾹 참고 숙소에 도착한다.

숙소 예약 기준은 딱 하나, '최저가'다. 절간 나뭇바닥에 침낭 깔고 자본게 3년인데 어디서든 못 자겠나. '발머스 백팩커스 호스텔'을 오늘의 둥지로 삼은 이유도 단순했다. Booking.com에서 요금(최저가)순으로 정렬해서 가장 위에 뜬 친구였다. '혼성 도미토리룸 10베드'가 뭔소린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처음은 늘 강력하다, 잊지 못할 발머스 백팩커스 호스텔


호스텔 스텝이 준 키에 13이라 적혀서 주인된 마음으로 당당히 13번 방을 열었는데 웃통을 벗은 남자 1명이 나를 돌아본다. 다시 나간다. 잘못 들어왔나보다. 하지만 키에는 13번이 쓰여있고 이 키로 나는 13번 방을 방금 열었다. 슬프게도 이 방이 틀림없다. 그래, 내 방에 핸드폰하는 남자, 코고는 남자, 그리고 팬티만 입은 남자 3명이 있다. 아, 혼성 도미토리가 남자랑 같은 방에서 잔다는 거였구나.

뒤늦은 현실인식 후 다시 조용히 문을 연다. 혼성 도미토리룸이 처음이지 않은 척, 3명의 남자에게 '헬로' 인사를 건네고 방에 들어가 구석진 침대에 가방을 내려놓는다. 아주 자연스러웠어. 잘하고 있어. 속으로 쉼호흡을 하며 주섬주섬 바디워시랑 샴푸를 꺼내 샤워실로 튄다.

원래 대학 MT 때 술 먹다보면 남녀 섞여서 자기도 하잖아. 아니야. 이건 달라.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내일이면 안 볼 사람인데 뭔들 못해. 근데 혼성 도미토리룸인데 팬티만 입은 건 진짜 비매너 아닌가. 아, 우리 오빠도 팬티만 입고 돌아다니지. 수영장 가도 웃통 벗고 돌아다니잖아. 샤워 내내 날뛰는 유교문화적 성관념을 달래느라 애를 썼다.

난 내가 개방적인 편이라고 자부해왔다. 남자애들이랑 성적인 농담도 잘 하니까. 하지만 처음 본 남자 3명과 한 방에서 자야하는 현실 앞에서 내 안의 조선시대 성리학자 한 분을 마주한다. 네, 학자님. 이제 어디 가서 절대 쿨한 척 안 할게요. 성리학자를 달래고 13번방을 연다. 이번엔 치즈를 많이 먹는 친구들에게서 나는 특유의 냄새에 적응해본다.

혼성 도미토리라고 특별한 건 전혀 없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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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만난 한국인들이 부담스럽다


해먹에 눕는다. 그래도 유럽에 왔다고 안 해본 것부터 골라서 한다. 잠이 안온다. 역시 혼자 여행하니 할 게 없다.


여기 한국인 짱 많아.


그 아이에게 카카오 보이스톡을 건다. 주변에 한국인들이 디글디글하다. 다들 나처럼 최저가 보고 온건가. 일본인도 중국인도 단 한 사람 보지 못했는데 호스텔 로비에 걸어다니는 세 사람 중 한 명은 한국인이다. 여기 와서 친해졌는지 어색하게 형, 동생하는 사람도 보인다. 괜히 통화하는 내 한국어 볼륨을 최소로 줄인다.

수줍게 해먹에서 놀아봅니다


Can you take a picture of me?


유럽에 와서 한국어 소리가 들리면 나는 급 한국인 아닌 척했다. 분명 저 사람 한국인인데 영어로 부탁한다. 해외여행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주변 시선으로부터 해방된 이 자유로움을 방해받기 싫어서였다.

나한테밖에 관심없는 나조차도 한국인을 보면 순식간에 견적을 낸다. 몇살이네, 쟤랑은 무슨 관계네, 뭐하러 왔네, 어때 보이네 등등등. 선입견같은 거, 평가같은 거 정말 싫은데 무조건 반사라 내 능력으론 어떻게 막을 수가 없다.

어두워져서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쿵쿵 음악소리가 난다. 아, 여기 밤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 클럽이 있다고 했지. 잠깐 멈춰선다. 외국까지 왔는데 말이지. 하지만 한국인 무리가 지하 클럽으로 내려가는 걸 발견한다.

'되게 못 노네.'

방금 내려간 한국인의 눈이 나를 훑는 상상을 한다. 조용히 방으로 올라간다. 평상시에 얼마나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억누르고 살길래 한국인만 보면 이렇게 위축되는걸까. 그러면 도대체 한국에서는 어떻게 살고 있는거야. 알고는 있었는데 이렇게 심각한 수준이었나. 내 행복의 최대 과제 '평가에 대한 집착', 해외에 와도 너를 피할 수가 없구나.

결국 들어가지 못했던 발머스 클럽 가는 문
도움이 될진 모르겠으나 유럽여행 상담이 항상 열려있습니다.
(카톡 ID : one1wa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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