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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쏘쏘 Jul 10. 2019

엄근진했던 배낭여행 국가 선정

스물여덟에 갑자기 유럽 2편 - 준비하다

2019.06.27-2019.06.28


4

엄근진했던 배낭여행 국가 선정


"짠!"
새벽같이 일어나 마일리지를 쌓아주신 위대한 아버님께 맛있는 식사를 손수 만들어 올렸다. 설거지하시려 그릇을 모으는 여행 적극지지자 어머님을 앉아있으시라 손사래치며 말린다. 손수 집안 빨래를 모아다 돌리고 절에서 3년 산 경력이 묻어나는 칼각으로 부모님 빨래를 모셔다 안방에 고이 전시해놓는다. 효도는 다다익선이다. 주체할 수 없이 끓어오르는 효심을 마구마구 분출했다. 속물처럼 속이 훤히 보이면 어때. 속물이 감사하다는데.

부모님을 출근시켜 드리니 아침 7시 30분이다. 어서 장장 2주치 계획을 짜야 한다. 중고등학교 시절 중간기말 준비할 때나 현실감없이 쳐다보던 교과서 속 세계지도를 구글 맵으로 간만에 펼쳐본다.


'아, 스페인이 지중해쪽에 있구나. 지중해 쪽엔 그리스만 있는 줄...'


미천하다고 표현하기도 부끄러운 지식이다. 스페인, 프랑스까지는 그 애와 그 애 아버님과 동행하면 되겠고 7월 5일 이후 행선지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진정한 여행 준비가 시작되었다.

'프랑스에서 덴마크로 올라가 노르웨이, 북유럽쪽으로 가볼까? 복지국가의 끝판왕을 눈으로 보고 오고 싶어.'
'아, 그래도 한때 대영제국이라 불린 산업혁명을 일으킨 영국, 그리고 런던에는 가봐야 하지 않겠어?'


여행지 후보를 결정하는 일에 임하며 부끄럽지만 대통령 후보를 선택할 때보다 엄격하고 근엄하고 진지했다. 가고 싶은 나라가 너무 많다(대선도 뽑고 싶은 후보가 너무 많다면 달랐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하지만 21세기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92년생 밀레니얼 세대답게 가성비를 중점으로 짰다. 영국과 북유럽은 스페인-프랑스 이후 동선으로는 너무 별로라 아쉽지만 다음에 가야겠다(이렇게 2차 유럽여행이 결정됐다).

'그래, 4차 산업혁명의 중심, 튼튼한 경제대국, 통일 선배국가 독일에 가야하지 않겠어?'


동선 때문에 가면서 이유는 그럴듯이 붙여댄다. 지성인 놀이는 유치한 줄 알면서도 잘난 척은 멈추기가 참 어렵다. 베를린, 프랑크프루트, 뮌헨, 드레스댄 등 어디선가 한번쯤 들어봤던 도시들이 구글 맵에서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늘 멀리서 말로만 듣던 그야말로 남의 나라였던 독일이 이렇게 가까운 나라였구나.

독일 별자리를 확대해서 보다 우연히 프라하라는 별을 아래켠에서 발견했다.


'헐. 이게 그 말로만 듣던 프라하?'


효심이 또한번 끓어오르는 순간이었다. 내 인생에 프라하를 가보다니. 어머님, 아버님 낳아주시고 키워주시고 유럽에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프라하는 꼭, 기필코 가야겠다. 프라하가 체코에 있는지 오늘 처음 알았지만 말이다. 그리고 눈을 크게 뜨니 빈, 부다페스트라는 별도 보인다. 잘 아는 별은 아니지만 해외에 문외한인 내가 알정도면 아름다울게 분명하다. 이번 여행은 동유럽, 너로 정했다.

스페인(마드리드-그라나다-세비야), 프랑스(파리-몽생미셸), 독일(프랑크푸르트-뮌헨-베를린), 체코(프라하)-오스트리아(비엔나)-헝가리(부다페스트)-폴란드(바르샤바)

16시간만에 2주간의 유럽여행 계획을 급조했다. 짧은 시간 나름 한글로 표까지 만들어서 동선과 참조사항까지 정리했다. 서유럽-동유럽 버전, 나만의 유럽여행! 여행은 이미 성공한 듯 싶었다.

감사한 Google m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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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안 자도 안 피곤할 수 있구나


이틀만에 유럽 2주 배낭여행을 준비한다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1분 1초가 이렇게 아쉬울 수가 없다. 여행계획과 출국준비를 마치니 벌써 다음날이 되었다. 새벽 2시, '내일도 사랑하는 부모님께 공양을 올리려면 최소 5시반에 일어나야 할 텐데'라는 걱정은 조급한 흥분 앞에서 무참히 짓밟혔다. 출국 하루 전 해야 할 리스트를 정리했다.

1) 당근마켓(지역주민 중고거래 어플리케이션)으로 28L 예쁜 커피색 등산용 가방 직거래
2) 짐 싸기(옷, 세면도구, 전자제품, 남친과 남친아버지 선물)
3) 배낭여행의 정석 버킹햇(벙거지모자)과 발목이 얇아보이면서도 안 아픈 최상의 샌들 구매
4) 교보문고에서 이번 여행컨셉을 잡아줄 책 1권 구매
5) 집에 널려 있는 개인물품 정리 및 내 방 청소

비장하게 미션 임파서블을 시작했다. 당근마켓 직거래 약속을 잡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 초반에 남자친구와 여행을 함께 하다보니 여행 패션 결정에 어마어마한 시간과 노력이 들었다. 전신거울이 있는 안방과 옷걸이가 있는 내 방을 눈썹 휘날리며 4시간을 뛰어다니다 보니 발이 새까매졌다(집 전체 청소하고 가야하나 순간 고민했다). 고심고심한 끝에 내가 가진 옷으로 구성할 수 있는 최선의 룩 몇가지를 완성했다. 배낭여행에 맞게 심플하면서도 자유분방한 느낌의 보헤미안 디테일이 들어간 구성이었다. 이 과정 또한 여행지 선정만큼이나 엄격하고 근엄하고 진지하게 임했다. 이토록 바쁜 와중 겉멋에 이토록 신경쓰는 내가 부끄러우면서도 귀여웠다. 속물이면 어때. 속물이 즐겁다는데.

'내가 이렇게 야무졌었나?'


효율은 똥줄에서 나온다. 정당에서 일하면서, 대학 과제를 하면서 얻은 최고의 교훈이다. 시간이 없으니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세면도구는 오늘을 위해 몇년간 쌓아둔 각종 화장품 샘플로 싸서 부피를 많이 줄였다. 박수받을만 하다. 마스크팩을 챙기며 남친, 남친 아버지와 함께 팩을 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한다. 방치했던 아이패드를 꺼내들고 빵끈을 찾아 USB선 등을 동여맨다. 어머니께 사정해 오빠 여친이 부모님께 선물한 홍삼을 공수해 선물로 챙긴다. 밤을 샜는데도 충전기 꼽아 놓은 폰처럼 이 세상 텐션이 아니었다. 인간이 안 자도 안 피곤할 수 있구나.

나만의 배낭여행룩 완성

  


6

생각이 바뀌면 여행이 시작된다


맘에 꼭 드는 벙거지모자와 샌들 인생템을 겟하고 교보문고로 갔다. 인생 첫 배낭여행의 길잡이가 될 책을 고르자니 눈이 이미 저 세상 수준으로 높아져 분야별 베스트셀러가 있는 구간을 무려 5번이나 돌아도 맘에 차는게 없다. 마지막으로 이 달의 베스트셀러 구간에 정착해 1위부터 쭉 둘러보는데 마음이 쿵 떨어지는 소리가 나 깜짝 놀랐다.

'백년을 살아보니'


올해 100세가 되신 철학자 김형석 선생님의 에세이 제목이었다. 스물여덟에 우습지만 갱년기가 의심될 정도로 7글자 앞에서 급 눈물이 났다.

22살에 다니던 대학을 휴학해 7년동안 대학에 돌아가지 않았다. 처음 1년은 행정고시를 준비하다 못 해 먹겠어서 가볍게 때려쳤다. 그리고 고시보다 더 빡센 문제를 만났다.

1. 나라는 인간은 왜 이렇게 애쓰며 사는지 30자 이내로 서술하시오.
2. 나라는 인간은 대체 뭘 하고 싶은지 주관식으로 답하시오.(복수응답 가능)

백지로 답안지를 제출했고 그 길로 시골의 절에 들어가 3년간 마음을 닦으며 사회에 봉사하는 수행 공동체살이를 했다(말이 어려운데 군대와 유사한 생활패턴에 자신을 살펴보는 정진을 보탰다고 보면 된다). 스물여섯, 서울에 다시 올라와 우연한 기회로 청년정당을 친구들과 꾸리게 되었고 새로운 정치모델을 만들겠다는 일종의 소명 의식으로(물론 정당 재정상의 어려움 때문이었으나) 돈을 받지 않고 활동했다. 스물여덟, 그 멋진 소명 의식이 부족했던걸까. 나는 그 일을 쉬며 스물여덟 여름, 백수가 되었다.

나를 찾으러 절에도 가봤고 사회를 바꾸려 정치운동도 해봤으니 이제는 정말 하고 싶은 걸 해야 겠다는 이른바 세번째 도전이었다. 7년 만에 다시 푸릇푸릇한 캠퍼스를 찾았다. 하지만 역시나 현실은 만만한 곳이 아니다.


28살에 다시 대학교에 간다고?


축하나 위로를 바라진 않았다. 주변 반응이 무서운건 스스로 그 주변반응을 내면화할 때다. 너무 늦었다는 불안함이 엄습해왔다. 학교를 졸업하면 30살이 될텐데 하고 싶은 걸 한다고 한들 나이만 먹고 경력이 없어 어디서 받아주기라도 하겠나. 자꾸 경제적 독립이 늦춰지니 부모님께도 죄송했다. 그렇게 실패했던 기억이, 냉혹한 현실에 대한 자각이 스물여덟의 나를 꾸깃꾸깃 구기고 또 구겼다. 아픈데 아프다는 말도 못하고 쪼그라들어버렸다.

7개의 글자가 쪼그라든 나를 딱 건들었다. 100세 어르신이 '늦었다고요!'라고 소리치며 울고 있는 28세 청년의 찡찡댐에 전혀 동요하지 않으신 채 '허허' 웃으며 서게 셨다.


책을 집어 들었다. 출국하기도 전에 내 여행은 이미 시작되었다.


도움이 될진 모르겠으나 유럽여행 상담이 열려있습니다.
(카톡 ID : one1wa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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