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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쏘쏘 Jul 11. 2019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알함브라 궁전

스물여덟에 갑자기 유럽 4편 - 그라나다(스페인)

2019.06.30 마드리드, 그라나다(스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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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입맛이지만 결국 한국사람


아침 일찍, 아직 적응이 안 된 유럽의 거리를 나선다. 오늘은 알함브라 궁전을 봐야하기 때문이다. 알함브라 궁전은 한때 스페인에서 제일 잘나가던 이슬람계 무어족이 기독교 국가들의 연타에 주춤대다 최후를 맞이한 마지막 아랍의 도시 '그라나다'에 있다. 마드리드에서는 기차로 3시간 반쯤 걸린다.


디스 원 플리즈.


기차 타기 전 아침으로 먹을 빵을 샀다. 어제는 13시간 비행 동안 먹은 기내식 2끼가 계속 안 내려가 과일만 먹었어서 유럽 조리음식은 이 빵이 처음이다. 바게트 두쪽 사이에 구불구불한 연노랑의 크림같이 생긴 속이 껴져있는 빵 사진을 가리키며 자신있게 외친다. 소중히 안고 있다 스페인판 KTX '렌페'에 타고 주위정돈이 됐을 때쯤 빵을 앙 물었다.

'웩'


크림인 줄 알았던 노란색 속은 오징어튀김이었다. 오징어튀김을 딱딱한 바게뜨에 끼워넣는 식감을 1도 고려 안한 조합도 놀라웠지만 그건 문제가 되진 않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스페인 음식의 간'이 문제였다. 아주 느끼하고 아주 짠 이 음식을 밥으로 먹는다니 충격적이었다. 나는 단짠과 치즈 및 유제품은 다다익선이라 여기는 전형적인 초딩입맛이라 유럽에 오면 사실 모든게 아름다울 것만 같았다. 그런데 짜서 싫고 느끼해서 싫었다. 이번 생에 강한 양념이 싫은 적은 처음이라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크림추가한 빠네와 치즈만 9cm인 시카고피자를 무생물 중에 제일로 여기던 내가 느끼하다고 싫어하다니... 아무리 김치보다 치즈를 좋아하고 미역국보다 콘스프를 좋아해도 그래봐야 한국인 입맛에 맞게 가공된 치즈와 콘스프를 좋아할 뿐이었던 거다.

마드리드에 흔한 오징어튀김 샌드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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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알함브라 궁전


그라나다가 눈이 부시게 빛나는 모습으로 3시간을 달린 우리를 위해 친히 마중나왔다. 새침한 마드리드와는 다르다. 햇살 때문인지 주름살이 싹 걷힌채 하얀 건물들은 일렬로 줄맞춰 외지인들을 향해 웃고 있다.


Hel-lo?


'말하는 고양이' 캐릭터를 닮은 호텔 지배인의 말꼬리를 올리는 영어와 과한 리액션은 전염성이 매우 강했다. 무거운 가방 대신 높아진 말꼬리와 함께 업된 기분을 들고 알함브라 궁전으로 향했다.



그 아이와 나는 더블데이트를 자주 즐긴다. 그 아이의 10년 소울메이트 어쿠스틱 기타와 내 허세와 로망이 꾹꾹 담긴 핑크색 통기타는 봄날 햇살에 비친 나무들 아래서 반짝반짝 노래하기를 참 좋아해서 그 둘을 데리고 자주 공원에 나왔었다. 어쿠스틱 기타, 다른 말로 스페인 기타는 가창력이 꽤 뛰어난 편이다. 그 아이가 스페인 기타와 노래하는 모습을 멍 때리며 바라보는걸 좋아한다. 긴장감 서린 그 아이의 동공과 손의 떨림도 찌릿찌릿 귀엽다. 그 아이는 고난이도 곡을 해내는 자신의 모습을 멋있게 여겼고 그러다 익힌 기타 곡 중 하나가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다.

알함브라 궁전 입구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처음 연습할 때 타지마할을 생각했었어."


"왜?"
"비슷할 거 같아서."


정답이었다. 실제로 알함브라에서 가장 유명한 나사르 궁전은 타지마할을 참고하여 지었다고 한다. 알함브라에 있는 나사르 궁전은 아래 있는 연못에 비쳐 대칭미가 꽤 예쁘다는데 그 인기값을 해서 몇달전에 예약이 마감된다. 그 아이가 아쉬운지 입구까지 다가가 꼿발을 들어봐도 나사르 궁전은 담장 뒤로 깊숙이 숨어 머리카락 하나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나 알함브라는 돌다보면 어느새 질릴 만큼 넓어서 나사르 궁전을 보지 못한 아쉬움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사르 궁전 옆 카를로스 3세 궁전


알함브라 궁전에는 기타치는 사람이 많을 줄 알았는데.


인간이라는 종족은 여러 감각 중에 80% 이상을 시각으로부터 느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청각, 촉각, 후각, 미각에서 받은 감동은 왠지 좀더 특별하게 느낀다. 이 날 하루만 100장 넘게 사진을 찍었지만 아무리 애써봐도 세상에 단 하나뿐인, 그 아이만의 선율이 지어 올린 알함브라 궁전을 따라갈 수 없었다.

알함브라에서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연주자님과 영광스러운 한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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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별로 살아간다는 축복


크리스찬이 95%이고 어디를 가도 거의 백인뿐인 스페인에 아랍식 건물 무더기가 당당히 자리잡고 있다는 건, 생각해보면 참 의외다. 천 년도 더 전에 아프리카에서 지중해를 건너온 '무어족'이라 불리는 아랍계 종족은 스페인에서 600년 넘게 터를 마련하고 살았다. 그래서 스페인의 현재 이미지와는 언발란스하게 스페인의 전통건축과 전통예술엔 로마, 르네상스 양식에 이슬람 양식이 더해져있다.


이곳 헤네렐리페는 왕족들이 여름 휴가를 보냈던 정원입니다.


억양에서 로봇미 넘치는 오디오 가이드를 목에 하나씩 건 세 사람이 너무 넓은 알함브라에 정신 못 차리다 우연히 오른 높은 정원은 헤네렐리페였다. 한 백 번정도 환생해서 오늘 내가 되었다면 그 중 한 번 정도는 왕족이었던 적이 있지 않았을까. 아마 그 생은 많이 외로웠을거다. 예전에 어느 재벌 기업 회장의 딸이 자살했다는 뉴스 얘기로 친구들과 2시간동안 단톡방을 불태웠었지. 헤네렐리페를 준다 해도 스키를 타고 싶다하니 스키장을 통째로 빌려줘서 아무도 없는 스키장에서 홀로 스키를 탔다는 그 아이가 되고 싶진 않다.

솟아오른 알카사르에 오르니 터미널부터 우리를 환영해준 하얀 색 벽과 연한 황토색 지붕을 가진 집들이 저 아래 쑥 들어가 정수리만 내놓고 있다. 마을을 위에서 내려볼 때면 영화 <남한산성>이 겹쳐진다. 이병헌과 류승룡이 다가오는 추위와 좁혀오는 청나라의 포위 속에서 감히 한숨조차 쉴 수 없는 공기에 둘러쌓여 수많은 백성들을 내려보고만 있다. 그라나다는 900년 전 교황의 명으로 스페인 내 기독교 국가들이 합세해 이슬람국가를 몰아내던 당시 마지막까지 항전했던 무어족 최후의 도시다. 지키는 것은 왜 번성할 때보다 더 어려울까. 내려감을 지켜보는 마음이 힘들어 기적을 만드는 에너지가 모이기 더 어려워지는 것 같다.


'과연 나는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려나?'


나는 저세상 수준의 남다른 욕심을 가진 인간이었다. 특히 이십대 초반 때는 내가 가진 능력의 정점을 찍어보고 싶었다. 인간관계보단 공을 세우는 걸 앞세웠고 현재가 아닌 미래에 살았다. 그렇게 애쓰는 독한 모습이 잘 사는 건 줄만 알았다. 그러면서도 집에 돌아가는 파란색 163버스가 마포대교를 넘을 때쯤 멍하니 보게되는 한강의 반짝임은 내 가슴을 쿡쿡 찔러 눈물을 핑 돌게 했었다. 날 알아봐주지 않는 세상에 서러운 마음만 한가득이었다. 사실 세상이 아니라 내가 날 알아보지 못했다. 이병현과 류승룡처럼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진 못해도 그저 눈앞의 장관에 '끼약' 소리지르며 라임레몬맛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는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그때는 몰랐다.

헤네렐리페에서 내려다본 그라나다 마을 전경
도움이 될진 모르겠으나 유럽여행 상담이 항상 열려있습니다.
(카톡 ID : one1wa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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