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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쏘쏘 Jul 13. 2019

파스텔족, 빨강빨강한 세비야에 가다

스물여덟에 갑자기 유럽 5편 - 세비야

2019.07.01 그라나다(스페인), 세비야(스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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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필터입은 그라나다


새벽 산책 나가실 분!


6시간을 걷게 한 넓디넓은 알함브라에게 KO패 당했다. 완전한 수면에 들었다. 아직 시차 적응을 못한 덕에 새벽 6시, 어제 못 간 니콜라스 전망대가 괜히 아쉬워졌다. 25일째 여행하며 새벽 투어는 처음이라는 두 동행에게 부지런한 아침형 인간인양 허세를 부리고, 새근새근 자고 있는 건물들을 뒤로 작은 골목을 따라 알카이신 언덕을 오른다.

아들과는 맡을 수 없던 새벽 공기에 신나신 아버님


새벽 필터는 시간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진 진귀한 필터다. 어스름한 느낌의 필터부터 일출 필터까지 초별로 바뀌어서 시간에 맞게 잘 활용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강력한 새벽 필터만의 장점은 주변사람 제거 효과다. 유럽 핫플레이스를 통째로 빌린 것같은 효과는 인스타 피플들에게 엄청난 기회다. 물론 영업시간이 아니라 내부 촬영은 물 건너가지만.

Google map 어플은 오르막길을 고려 안하는 것일까. 안내해준 시간보다 2배는 더 올라가서야 닿은 그라나다에서 가장 잘 나가는 니콜라스 전망대는 굳게 닫혀있었지만 그 옆의 광장이 전혀 꿇리지 않으니 이리 와보라고 빛으로 손짓한다.


'세상에, 어제 본 알함브라 궁전 맞음?'


알함브라 궁전은 은은한 조명으로 언덕 위에서 자신의 예쁨을 오지게 자랑하고 있었고 마을은 가로등으로 이루어진 은하수에 뒤덮여 반짝거렸다. 또 몰래 자리를 비워주신 아버님을 찾는다고 잠깐 뒤돌아 본 사이에 해가 밝아졌다. 건물들이 눈을 비비며 일어나고선 낮에 쨍한 햇빛보다 훨씬 감성감성한 맑은 느낌의 필터로 갈아입었다. 아침잠이란 비싼 값을 치르기 잘 했다.

새벽에도 열미모중인 알함브라 궁전(왼쪽)과 그라나다 은하수


꼬불꼬불한 골목을 따라 내려간다. 우리로 따지자면 차로는 못 가는 높다란 달동네다. 역시 땅의 값어치는 부동산 가격이 다가 아니다. 그 곳만 가진 전망이 있고 스토리가 있고 숨겨둔 인프라가 있다. 파랑과 보라 그 어느 중간즈음의 색을 가진 꽃이 늘어진 담장도, 예쁜 골목 옆에 예쁜 골목도 감히 돈 액수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과 인사하며 골목을 따라 내려간다.

꽃이랑 미모 대결 중이신 아빠와 아들

새벽 투어의 단점이 하나 있다. 위장이 아침부터 비장하게 음식을 빨아들일 준비상태에 들어간다는 거다. 알카이신 언덕 내려가자마자 이 기회를 놓치지 않는 누에바 광장은 내 위장을 향해 갓 구운 빵냄새을 뿜어댔다. 1도 고민없이 미끼를 문 세 마리의 물고기는 아침 7시부터 1인 1브런치를 달렸다.

새벽빨 빼고 존맛탱 인정, 스페인식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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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텔족, 빨강빨강한 세비야에 가다


이왕 그라나다까지 내려온 김에 스페인 남부 지역 대표 도시에 가보자는 내 빡빡한 욕심으로 두 분 손목을 잡아끌어 도착한 세비야에서 상대성이론을 무시한 시간여행을 경험한다. 세비야는 한때 스페인의 잘 나가던 효자였다. 아직도 해상무역의 대표 주자였던 그 시절을 잊지 못했는지 화려하게 사는 습관이 여전하다. 유럽 최대 성당과 지금도 왕족이 산다는 알카사르 맞은 편엔 전세계 브랜드는 다 모아둔 산타크루즈 광장이 서 있는데 600년 전의 화려함과 현대의 화려함이 의외로 잘 아울린다.

산타크루즈 광장과 세비야 알카사르 사이의 시간여행샷


세비야에선 유독 빨강을 많이 만난다. 시선집중은 사절,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있어야 마음이 안정되는 파스텔족에게 이런 높은 텐션의 빨강은 좀 부담이다. 다행히 금방 적응했다. 두가지 빨강템 덕분에.


첫째는 샹그리아의 빨강. 빨간 사과가 둥근 떠다니는 빨간 샹그리아는 몇 분만에 자기 색깔로 사람 볼을 물들이는 능력이 있다. 빠른 시간에 세비야에 적응시켜 주는 가성비 높은 아이템이다. 세비야답게도 한 잔 시켰더니 막걸리 두 사발정도의 양이 나온다.

화채만큼 나오는 세비야 샹그리아(사과 칵테일)


두번째는 플라밍고의 빨강이다. 플라밍고는 스페인 전통춤과 전통민요가 결합된 공연인데 광장에서 버스킹도 할 정도로 세비야에 널려있다. 호텔 지배인이 추천하길래 여행지에서 문화를 감상하는 것도 약간 멋있는 느낌이니 가보기로 했다. 지배인이 그냥 자기 유착 관계로 퀄리티랑 상관없이 추천한건 아닌가 의심을 했던 기억조차 날라갈 정도로 미간까지 찌푸리면서 봤다. 엄청 빠르고 격하다. 보고 있는 내가 살 빠지는 줄.


'나는 절대 못해.'


그라나다 오기 전 마드리드에서 지하철을 타다 갑자기 춤을 추는 스페인 커플을 보며 부럽다는 말을 그렇게 돌려 말했다. 고딩 시절 버킷리스트였던 홍대 클럽에 드디어 갔던 날, 슬프게도 나는 들어간지 두 시간쯤 열심히 견디다 지쳐 결국 친구들을 놔두고 혼자 집에 갔었다. 그 날의 나 자신을 향한 실망감은 말하자면 수능 점수가 고3 모의고사보다 훨씬 낮게 나왔을 때와 비슷했다. 나도 잘 놀고 싶다. 다만 잘 노는 방법을 모를 뿐. 스페인 길을 걷다보면 대화하듯이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춤을 춘다. 스페인은 노는 연습을 시작하는데 꽤 괜찮은 클럽이다.

의외로 시간가는 줄 모르고 본 플라밍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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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들기 싫은 밤


잠시 숙소에서 쉬다 이번엔 밤 거리를 나서본다. 예전에 인상파 화가들이 빛에 따라 사물이 다르게 보인다고 했었는데 무딘 동공을 가진 나는 여행을 와야만 그런 감성이 살아난다. 밤에 보면 또 밤의 모습에 반한다. 은은한 가로등 조명에 주황빛으로 바뀌어버린 채 반 틈만 보여준 세비야의 거리들은 낮에 지나온 길과는 또 차원이 다르다. 나도 좋아하는 사람을 꼭 밤에, 그것도 형광등이 아닌 누런 조명을 쓰는 레스토랑으로 데려갔었지. 때론 자세히 보지 않아야 예쁘니까.

밤에 더 예쁜, 세비야의 흔한 중세식 건물


밤은 참 모순된다. 자야 할 때인데 너무 감성감성해서 자기 싫다. 내일이면 헤어져야 하는 이 도시와 꿈나라에서 인사할 수는 없다. 내 체력이 버텨주는 한도까지는 이 밤을 더 진하게 보내고 싶다. 거리에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여기저기 보인다. 이 사람들 모아서 재깍재깍 지나가는 매정한 이 밤과 줄다리기하면 이길 수 있겠는데.

민드느라 고생하셨겠지만 좀 괴상한 메트로폴 파라솔


벌집처럼 생긴 메트로폴 파라솔이 춥지 말라고 빛을 내어 광장을 데피고 있다. 파라솔에서 바라본 세비야 대성당도 12시간만에 금으로 뒤덮여버렸다. 하지만 메트로폴 파라솔보다, 세비야 대성당보다 빛을 내는 어떤 게 손바닥을 타고 느껴진다. 두 손바닥에 포커스된 사진기는 세상을 블러 처리해버렸다. 36.5도만으로도 감동할 수 있는, 잠을 자고 싶은 생각이 1도 안 드는 밤이다.

금으로 변한 세비야 대성당을 볼 수 있는 메트로폴 파라솔
도움이 될진 모르겠으나 유럽여행 상담이 항상 열려있습니다.
(카톡 ID : one1wa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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