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부자들의 컴플렉스 알아?
그때 내가 알바했던 곳이 5번가 근처라고 했잖아. 당시가 20여년 전이니 또 뉴욕이 엄청 잘 나가던 시기야. 그래서 그 네일샵에 오던 사람들도 지금 돌이켜봐도 찐부자들이었어. 뉴욕에서 젤 큰 제지회사 사장 딸, 부동산 재벌 가족 그런 사람들이 꽤 있었어. 고된 가운데, 양 팔에 까르띠에 러브링을 여러개씩 주렁주렁 하고 온 럭셔리한 여인들을 보는 재미가 있었지.
그 사람들이 네일샵 오면 얼마나 말이 많게? 시시콜콜 수다가 엄청나. 어디서 결혼하는지, 이사갈 집이 어떤지, 어디서 뭘 샀는지. 얼마전에 안나라는 드라마 있었잖아. 수지 나오는 거. 그거 보면서 그때의 내가 떠오르기도 했어 ㅎㅎ
근데 그 사람들이 일순간에 조용해지는 때가 가끔 있었어. 그건 바로 유럽에서 온 예쁜 여자가 샵에 들어왔을 때! 한번은, 비 오던날 딱 봐도 완전 세련된 프렌치가 하나 들어왔는데 네일을 하러 왔었어. 연한 브라운 컬러로 해달라고 프렌치 억양으로 얘기하더라고. 원래 그 샵에 오는 사람들이 제일 많이 하는 컬러는 누디한 반투명 색이었는데, 내 손님도 갑자기 그 색으로 바꾸겠다는 거야 ㅋㅋ 그리곤 프렌치 억양으로 말하는 영어가 아름답다고 자기네끼리 난리가 났어.
그제서야 나는, 왜 그런 샵들에서 미국판 보그나 바자를 보지 않고 굳이 영국판을 보는지 단번에 이해가 됐어 ㅎㅎ 지금도 좀 그런 부분이 남아있던데, 뉴욕이 세계 어느 도시보다 부유하던 기 시기에도 문화적으론 유럽에 컴플렉스를 많이 느끼더라고.
반면, 한번 호주에서 온 관광객이 샵에 들어온 적이 있었어. 호주관광객을 본 뉴요커들의 반응이 프렌치가 들어왔을 때랑 정 반대여서 좀 놀랐지. 일순간 조용해진 건 똑같았는데, 이내 그녀의 억양과 메이크업, 패션까지 촌스럽다고 쑥덕거리기 시작했어. 정말 별로지 ㅋㅋ
그거 역시 뉴요커들의 문화적 컴플렉스라는 생각이 들었어. 역사가 짧고 문화적 배경이 얕은 것에 대한 졸부 컴플렉스가 있었나봐.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욕은 정말 화려하고 멋진 도시였어. 이런 배경들 때문인지 전세계의 디자이너들과 아티스트들이 몰려들었거든. 그래서 22살의 나는, 그 럭셔리함 속에서 상대적으로 한없이 작아지더라. 너무 주눅이 들어있어서 어디 상점에서 내 돈 주고 뭘 살 때도 목소리가 기어들어갈 정도였지.
그래도 감사하게도 좋은 것들을 계속 보니 눈은 점점 높아졌던 것 같아.샵 쉬는 날마다 맨하탄 도처에 널린 갤러리와 미술관에 가는 게 일이었지 뭐. 보는 건 공짜니까 ㅎㅎ 쇼핑을 워낙 좋아했으니 백화점이나 로드샵들도 매일 갔어. 뭔가를 자주 사진 못했지만 보는 것마다 별세계였지. 특히 뉴욕 백화점의 윈도우 디스플레이는 유명하잖아.
나는 20대 초반이, 사람들의 문화적 스폰지시기인 것 같아. 그때 보고 배운 것들이 평생의 취향을 결정한다는 생각이 들거든. 뭐든지 보는대로 듣는대로 쏙쏙 흡수하게 되더라.
그런 면에서, 고생은 엄청 했지만 뉴욕에서의 일년은 내 인생에 있어 정말 중요한 시간들이었던 것 같아 ㅎㅎ 특히, 모든 계급장 보호막 다 내려놓고 내 자신의 실체를 오롯이 들여다볼 수 있는 시기였다는 생각이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