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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인 Feb 07. 2021

99. 목숨을 거는 듯한 끈기

나는 참 포기를 잘한다. 정확히는 오르지도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내가 발로 공을 다루는 것이 익숙지 않다는 것을 알고부터는 축구는 물론 족구도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다.

못할 것에 쓸 데 없는 에너지를 쏟는 것은 낭비라고 생각한다. 팀원이 있는 경우에는 민폐라고도 생각하고.

적당히 어울리는 정도라도 못할 거면 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그 시간에 내가 더 잘하고 재밌는 것을 하는 게 낫다고 느낀다.


내기를 거는 것에도 그렇게 큰 흥미를 가지지 않는다.

사람은 내기를 거는데 본능적으로 이끌린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내가 굳이 잃어야 할 판에 들어가야 할 동기를 찾지 못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유행하던 동전을 가지고 하는 도박이라던지, 직장에서 가위바위보로 상품을 가질 사람을 뽑는 내기를 한다던지 그런데 일체의 관심이 없다.

할 사람 붙으라고 소리치며 얘기해도 가까이 가지도 않고, 강제로 참여하게 돼도 떨어지는 것에 아쉬워하지 않는다.

떨어지면 그냥 떨어졌구나 하고 다시 제자리로 갈 뿐이다. 안 된 것을 가지고 아쉬워하며 발을 동동 굴러봤자 내 마음만 다치게 만드는 일이다.


승부에도, 경쟁에도 익숙하지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다.

1등을 하고, 트로피를 거머쥐면 기분은 좋겠지만, 그 행위를 위해 가슴 졸이는 매 순간이 나에게는 고역이다.

주변 사람들의 기대도 고역이다. 그래도 못해도 어느 정도는 하겠지 싶은 그 눈빛들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두근거리니 기분 좋다고 말하는 그 묘한 고양감을 나는 고양감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단지 매일매일이 편안한 마음가짐을 가진채 살아갈 수 있으면 그것으로 좋다.


그런데 그것과 별개로 끈기는 있다. 승부도 경쟁도 싫어하고, 못할 것 같은 것에는 발도 들이지 않지만 이상하게 끈기는 있다.

한 번 하고자 한 것은, 내가 물러나지 않겠다 마음을 먹은 것에 있어서는 어떤 타협도 없다. 내 신변에 무슨 문제가 생기지 않는 이상 한 번 목표로 잡은 것은 끝낸다.

마치 한 번 물기로 한 것은 절대 놓치지 않는 리트리버처럼 오늘은 좀 쉬지 그러냐는 다른 이들의 조언도 거부한다. 무조건 끝장을 봐야 한다.

게임도 그렇고, 다이어트도 그렇고, 내 군생활도 그랬다. 사소한 것부터 인생의 경로를 지정하는 것까지, 내가 한다고 생각한 건 어떻게든 포기하지 않았다.


투쟁심이나 경쟁심이 없는 건 언제나 같아서, 처음부터 이렇게 끈기가 있던 건 아니다.

내가 재밌어서 빠져든 것 아니면 손을 대지 않는 편이었고, 경쟁심이 없는 만큼 잘하지 못한다 싶으면 목표로 잡은 것도 그냥 내려놓기 부지기수였다.

내가 소논문을 분리수거함에 던져 넣은 것도, 축구나 첼로, 피아노를 그만두게 된 것도 중학교 때까지의 일이었다.

그러다 검도를 만났다. 우울함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가는 나를 어떻게 운동이라고 시켜야겠다는 어머니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였다.

별로 하기 싫었지만 그 당시 월 8만 원이라는 고가의 강습비는 다른 학원은 안 다녀도 된다던 어머니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 같아 울며 겨자 먹기로 다닐 수밖에 없었다.


검도는 여러모로 혹독했다. 굳이 따지면 역시 일반적인 스포츠보단 격투기기 때문에, 기합과 반복적인 훈련이 강습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머리치기 100회, 손목치기 100회, 허리치기 100회. 보통 매일 반복되는 가장 가벼운 준비운동이었다.

그러고 나면 호구를 입고 상대방을 반복해서 치고, 대련하는 것이다. 내가 호구를 쓴 모든 곳은 상대방의 타격 범위였다.

호구를 쓰고 나면 아프지 않겠지,라고 착각할 수 있지만 그냥 맞으면 크게 다치기 때문에 입는 것이다. 허리는 그래도 단단했지만, 머리나 손목은 사실 두꺼운 천 하나 덧댄 것이었다. 충격은 그대로 전해진다. 손목을 잘못 맞은 날이면 손목에 긴 멍이 드는 것이 일상이었다.


보통 스포츠였다면 거기서 그냥 그만뒀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아프고 다치는 것은 딱 질색이다. 싸우는 것도 천성이 아니고 말이다.

하지만 난 고등학교 1학년까지 도장을 다녔고, 대학에 와서도 검도부 동아리 회장을 하면서 검도에 매달렸다.

사범님이 가르친 검도에 대한 자세가 나를 검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검도는 생사를 겨루는 스포츠다. 잘못  맞아서 죽는 게 아니라 죽도를 목도로만 바꾸면 죽는다. 모든 순간순간을 죽지 않기 위해 싸운다고 생각해라.’

목을 죽도로 찔려 컥컥 대는 내 등을 두들겨주며 하던 사범님의 말은 상황도 상황이라 더욱 현실로 와 닿았다.

‘아, 잘못하면 죽을 수 있겠구나.’


물론 죽을 수 있는 스포츠라면 도망치는 건 더욱 당연하다. 내 삶의 방식이라면 분명히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 뒤에 붙었던 사범님의 말이 나를 도장에 붙잡아 뒀다.

‘하지만 아직 목은 떨어지지 않았다. 칼은 아직 네가 붙잡고 있다. 칼을 떨어트리는 순간이 정말 추하게 죽는 순간이다. 포기하지 마라.’

문명화된 21세기에 들을 가르침은 아니지만, 그 말이 나를 왜인지 나를 일으켜 세웠다.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승부는 상관없었다. 내가 죽기가 싫었고, 칼을 땅에 내려놓고 싶지가 않았다.

몇 개월이 지났을까. 나는 도장에서 가장 저돌적으로 상대를 몰아붙이는 사람이 되었다. 지쳐서 헐떡대도 눈 앞에 있는 사람이 내 점수를 따지 않았다면 끝까지 달라붙어 칼을 휘둘렀다. 그 사람이 전의가 있거나 없거나, 어떤 스타일의 검을 들고 들어와도 마찬가지였다. 링 끝까지 밀어붙이며 물어뜯는 스타일의 사냥개가 되었다.


그때부터 내게 설정된 목표는 전부 목숨을 걸고 하는 대련과도 같아졌다.

내가 설정한 목표가 칼을 들고 걸어온다. 이미 목표를 정해버렸고, 대련은 시작되었다. 대련이 시작되기 전에 도망쳤다면 모를까, 이미 목표와 싸우는 대련이 시작된 순간부터는 도망간다는 것은 내 목숨이 걸린 일이 된다. 도저히 도망갈 수가 없다. 내가 목표에 짓눌려서 실패하거나, 내가 끝까지 물고 늘어져 이기거나 둘 중 하나다.

학군단 생활도, 부대 생활도, 직장생활도, 마찬가지였다. 다이어트나 게임도 마찬가지였다. 삶의 한 가운데거나, 단순히 취미여도 내가 목표로 했다면 아무리 추하고 지저분해도 먼저 그만두지는 않는다. 질린 쪽에서 먼저 나를 버리는 것이 아니면 끝까지 잡고 버틴다. 내 손에는 아직 칼이 들려있으니까. 일어나야만 한다.


승부는 상관없지만 그럼에도 일어서고, 엉겨 붙는 거머리 같은 끈기는 내가 생각해도 내 어정쩡한 모습을 그래도 ‘조금 괜찮게’ 어정쩡한 모습으로 만들 정도로 좋은 역할을 해줬다고 생각한다.

물론 끈기의 원천이 목숨을 거는 듯한 형태라 내 체력과 멘탈을 많이 잡아먹는다. 그건 조금 고쳤으면 어떨까도 싶다. 언제까지고 20대의 괜찮은 체력과 정신을 가질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세상을 매일매일 칼을 맞대는 전쟁처럼 산다. 내가 목표로 한 것만의 이야기지만, 지금은 나름의 자부심도 있다. 절대 목표로 한 것은 놓지 않는다는 그 자부심. 조금 추하게 쓰러지고 질질 끌려다녀도 물고는 있고, 언젠가 다시 일어선다는 데 대한 자부심이 있다. 내 마음에 흔치 않은 자부심이다.


다음 목표는 뭐가 될까. 한 가지 목표가 끝나면 다시 다음 목표를 찾는다. 조금 과하게 목표를 물고 있는 것 같아 요즘은 좀 문 것을 놓는 연습도 하고는 싶은데, 쉽지는 않다.

다른 이들이 잘 봐주지는 않는 목표더라도 내가 끝낼 수 있는 목표를 다시 찾고 싶다. 그리고 얼마가 걸리든 완수해 낼 것이다.

투쟁하기도 싫고, 경쟁하기도 싫은 사람의 내면은 언제나 이렇게 전쟁과도 같다. 그것도 좀 모순적이라 웃음이 나오지만, 그래도 애매한 인생 무언가 이렇게 하나씩 물어 넘어트리다 보면 언젠가는 빠르게 포기하는 애매한 내 모습도 변하지 않을까 싶다.


오늘도 마음의 호구를 다 잡아맨다. 내일은 또 내일의 목표가 있다. 영업을 해야 하는 고객이기도 하고, 새로운 글감이기도 하다.

어찌 됐던 목표 삼았으니 내가 먼저 놓을 일은 없을 것이다. 놓을 일이라면 차라리 처음부터 먼저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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