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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인 Feb 06. 2021

98. 나 자신의 해답에 대한 질문.

‘천재는 모든 질문의 해답이 아니다. 모든 해답에 대한 질문이다.’

내가 오랫동안 좋아한 아티스트인 타블로의 초기 가사 중 하나다.

많은 가사를 들어왔지만 그중에서도 노래를 들으며 경탄한 첫 가사여서 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래, 천재라면 모두 맞다 생각하는 해답에 대해서 의문을 품어야지. 역시 천재는 달라.

가사를 쓴 사람이 스탠퍼드를 졸업한 사람이어서 그런가, 난 사람은 난 사람이다 그렇게 감탄하며 들었다.

동시에 그 가사가 나와는 큰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야 뭐, 스탠퍼드는커녕 한국에서도 그렇게 좋은 학교에 진학하진 못했고, 특별하게 두각을 나타낸 분야가 지금까지 없으니까. 모든 질문의 해답이나 찾을 수 있으면 다행이겠거니 싶었다. 모든 해답에 대한 질문이라니, 그런 건 너무 먼 세상 이야기였다.


글을 쓰기 시작하다가 어느 순간 글이 막혔다. 며칠 연속으로 내 글에 질문이 너무 많았다.

나는 글을 쓸 때 의도적으로 반복적인 활용을 피한다. 보통은 두 번 이상 비슷한 활용을 하면 그 뒤로는 그런 활용을 극단적으로 자제하고 다른 방법의 표현을 찾아 나선다. 꽤 불편한 방식이지만, 생각의 폭을 넓혀주고, 읽는 사람이 질리지 않게 만들 수 있다 생각해 사용하는 나만의 법칙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며칠 연속으로 아무리 글에서 질문을 지우려고 해도 질문이 계속해서 머리를 들이밀고 튀어나왔다.

더 나를 고심하게 만든 것은 그 많은 질문 중 내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한 개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글 속에 질문이 나온다면 최소한 질문을 해소할 실마리는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작가는 무책임한 발제자가 아니니까.

그런데 아무리 질문을 털어내 봤자 질문은 내 손을 물고 늘어났고, 답을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니 정말 죽을 맛이었다.

글 쓰는 시간은 점점 길어지고, 글을 지우고 다시 쓰는 일도 하루에 여러 번 있었다. 그와 반비례해 내 글의 퀄리티는 점점 떨어졌다. 글을 쓰는 것 자체가 피곤해지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남는 건 질문 투성이인 글과 질문을 피하려다 보니 이도 저도 아니게 된 글. 아니면 피곤에 절어 어떻게든 짜내 보려고 짜낸 글만이 남았다.


막다른 길 같았다. 내가 이 정도로 사유가 짧았나, 자기 자신에 대해 화도 났고, 재능이 없나 돌이켜 생각해보기도 했다.

물론 우습게도 막다른 길이 아닌가 생각하면 할수록 질문은 지치지도 않고 늘어났다. 나 자신에 대한 질문들이 엉겨 붙고 엉겨 붙어 스웨터의 보푸라기처럼 온몸 곳곳에서 생겨났다.

그렇다. 엉겨 나오는 질문들은 모두 나 자신에 대한 물음이었다. 나의 감정, 나의 생각들을 늘어놓는 횟수가 늘어나는 만큼 내 존재 이유와 같은 궁극적인 것부터 내 고치지 못하는 습관에 대한 근원까지 나를 이루고 있는 다양한 것들에 대해 답을 내리기를 원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주제로 글을 쓰게 된 것이 어느새 나를 분석하고, 정의 내리고자 하는 욕망에 불을 붙이고 만 꼴이었다.

어느 누가 그 질문에 답을 내릴 수 있을까. 나 자신의 존재 이유라던지, 자신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원인에 대해 제대로 대답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있긴 있을까? 결국 나는 기껏 해봐야 많은 가설 중 하나를 조심스럽게 질문의 답이라고 얹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 내가 애매해진 원인은 책임감 때문일 거야’. 이런 식으로 말이다.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언제나 빈약했다. 당연히 내가 나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없었으니까.


‘천재는 모든 질문의 해답이 아니다. 모든 해답에 대한 질문이다.’

여느 날과 다를 것 없이 업무를 하며 노래를 듣고 있을 때, 우연히 타블로의 이 가사가 다시 귀에 박혔다.

참 오랜만에 듣는 가사였다. 그가 메이저 데뷔할 때 나온 가사였으니, 요즘 찾아 들을 만한 노래는 아니었다. 얼마 만에 들었는지 기억도 안 났다.

그리고 그 가사가 역설적으로도 질문으로 가득 찬 내 글의 해답이 돼주었다.


나는 질문을 피하는 것을 그만뒀다. 질문에 어정쩡한 가설을 해답처럼 다는 것도 그만뒀다. 이전보다 더 공격적으로 답도 하지 못할 질문을 글로 남겼다.

내가 볼 때 내 글은 점점 난잡해졌다. 질문에 질문이 꼬리를 물고 해답 없는 질문들이 글 여기저기에 남겨졌다. 여전히 이게 맞는지 확신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나에게 나 자신이 주는 질문은 해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했다. 타블로가 말했듯, 천재는 모든 질문에 대한 해답이 아니고, 모든 해답에 대한 질문이니까.


갑자기 무슨 소리 일까. 뜬금없이 자신이 천재라고 얘기하는 것일까?

그건 아니다. 내가 천재라니. 수십 년 후의 나도 지금의 나도 우스울 말이다. 나는 천재가 될 수 없다.

단지 나 자신을 알아가는 데만큼은 천재를 지망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저 남이 만들어준 삶의 방식대로, 해답에 맞추어 의문을 가지지 않고 사는 것은 못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내 속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나 자신이 무엇이다라고 해답을 내리지도 못하는 사람이다.

나는 ‘대체 내가 왜 이럴까?’라고 답 없는 질문을 던지며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내가 왜 이렇게 애매하게 되었는지, 나는 왜 이렇게 우울한 사람이 되었는지, 왜 사람과 엮일 수 없는지, 내 책임감은 언제부터 씌워지게 된 것인지...

시니컬하게 ‘네가 아직 그만큼 노력하지 않았으니까’, ‘네가 아직 진짜 힘든 걸 안 겪어봤으니까.’라고 몰아붙이면서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질문에 재갈을 채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남들 하는 만큼 하지 않아서’ 내가 이렇게 되었다는 것으론 나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타인과 나는 영원히 다르고 섞일 수 없는 경험을 하고 있으니까.

그건 내가 따를 수 있는 해답이 아니었다. 나만이 납득할 수 있는 해답을 내기 위해 나는 해답이 나오지도 않는 내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계속해서 고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처음부터 맘 편하게 나는 그냥 이래라고 살 수 없는 사람이었다. 천재까진 아니어도, 나에 대해 알아가는 데만큼은 천재를 지망할 수 있는 사람으로 태어났다.


천재는 삶이 피곤하더라도 결국 세상이 모두 당연하다 생각하는 데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 해답들에 대한 질문의 끝에는 세상의 변화가 있다.

그렇다면 나에 대해 알아가는 데만큼은 천재를 지망한다면, 적어도 나 자신의 삶의 해답 위에 쌓인 질문의 끝에는 나 자신의 변화가 있을 것이다.

내가 이 질문 끝에 어떻게 변하게 될지 나는 모른다. 내가 왜 이런지에 대한 수백, 수천 가지 질문들이 쌓여서 유의미한 결과를 낼 것이라고 단언할 수도 없다.


하지만 내 질문에 대한 해답을 내릴 수도, 타인의 해답을 따를 수도 없다면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천재를 자처하겠다.

최소한 나를 알아가는 데만큼은 누구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되겠다. 세상의 변화는 아니더라도 아주 작은 내 마음속 세계의 변화는 가져와보겠다.

언젠가는 내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길, 그리고 그 답 위에 다시 질문을 쌓길 바란다.

내가 쓴 모든 나를 향한 질문 위에 해답과 질문이 다시 쌓이길 바란다.


삶을 살면서 모두가 그렇다라며 당연하게 살지 않기를 바란다.

나 자신을 향한 질문을 통해 내가 더 나은 나로 변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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