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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지 Sep 09. 2019

나를 찾기 위해 퇴사했습니다.

대책 없이 퇴사했습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4년 넘게 재직한 회사를 떠났습니다.

스타트업을 운영했던 대학생 시절을 제외하면, 제대로 된 첫 사회생활이었습니다. 그만큼 성장했고,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어버려 이곳으로 떠나기로 결심하고 행동으로 옮기기까지는 오랜 고민이 필요했습니다.

퇴사를 통해 무언가 대단한 것을 성취할 수 있다고 기대하진 않습니다. 그저 나를 조금 더 이해하고, 단단해지는 시간을 가지고 싶었습니다. 시간을 흘려보내고 나면, 이렇게 결심하고 용기 내기가 쉽지 않아진다는 것도 알았기 때문입니다. 퇴사 이후 저에게는 계획이 너무 많기도 또 없기도 합니다. 회사에서는 제가 결정을 되돌리길 기대하며 정확히 무엇을 할 예정인지 알고 싶어 했습니다. 애써 몇 가지 떠오르는 키워드를 말했습니다만, 사실 대단한 계획은 없습니다. 흐르는 대로 살아보는 것도 인생에 다신 없을 기회이니까요.


저의 주된 업무 중 하나였던 브랜드 시즌 화보 디렉팅 때 사진을 담아봅니다.


'회사가 싫어서 퇴사하지는 말자'라는 기준을 세웠습니다.

선배님들은 저에게 '요즘 많이 일이 힘들어서 그래? 이 또한 다 지나갈 거라고 마음을 먹어보는 것은 어때.'라고 위로해주셨습니다. 인사팀은 몇 주간 휴직하라는 제안도 주셨고요. 그럴 때마다 '에이, 제가 일이 많아서 스트레스받는 거 보셨어요? 전 어쩔 수 없이 태생이 노예랍니다.'라고 우스갯소리를 건네었습니다. 과장된 표현이긴 하나, 저는 이곳에서 일할 때 즐거운 순간, 감사한 순간이 참 많습니다. 회사 기준 낮은 연차임에도 불구하고, 경영진들에게 직접 나의 제안이 얼마나 유의미한지 설득하며 주도적으로 업무를 끌어갈 수 있었던 기회들과 보기 드문 감도를 지닌 자원이라며 인정받는 순간들은 제가 4년간 회사에서 열심히 일할 수 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제가 회사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결국, 퇴사하였습니다.

얼마 전, 1년 차 신입사원이 사직서에 작성한 글이 화제가 된 적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회사의 낮은 집단 윤리 수준, 조직과 조직원의 목표 불일치, 변혁이 필요한 시기에 그때그때 상황을 때우고 넘어가는 것을 대단한 변혁을 하고 있는 것처럼 위안 삼는 모습에 퇴사를 할 수밖에 없다는 글이었습니다. 매우 공감하며 제가 퇴사하는 이유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다고 느꼈으나, 현 회사의 상황을 날카롭게 비난하며 글을 쓰기엔 신입사원이 가질법한 뜨거운 애정보다 애증과 같은 '정'으로 회사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또한 조직이 쉽사리 변화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아버렸습니다. 무엇보다 조직의 안위를 걱정할 때가 아니란 생각도 했습니다. 설령 조직은 변하지 않아도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으나 '나'라는 개인은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될 것이 분명하다는 점이 공포스러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의 다음 스텝을 위한 휴식의 시간과 도전의 시간이 필요하다 느꼈습니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며 매달 들어오는 월급에 자위하며 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남들이 만들어놓은 목표보다 나의 목표와 가치를 고민하고 싶었습니다. 평생직장이 사라진 이 사회에서 조금 더 빨리 나의 역할을 고민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내가 아직 모르는 무수히 많은 정답들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나에 대한 자신이 있기도 했습니다. 도전에 실패한다 한들, 전 세계에 저 하나 일할 곳 없을까요? 


출근길 꼭 들렀던 카페



이렇게 호기롭게 말했지만 퇴사를 일주일 앞두고 저는 몇 번이고 눈물을 훔쳤습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먹먹하고도 아련한 감정이었습니다. 유학길에 오를 때도, 학교를 졸업할 때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제가 생각보다 회사를 많이 좋아했나 봅니다. 애정 했던 곳이 어느 순간 개인의 성장과 공존할 수 없는 곳이 되었다는 현실이 슬프기도 했습니다. 조용히 티 내지 않고 퇴사하려 했으나, 그러기엔 제가 아쉬워 잠깐이나마 접점이 있던 분들까지 정리하니 대략 200명가량의 분들에게 메일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를 떠나는 순간을 앞두고 감사함을 담아 메일 드립니다. 
혹여나, 답장을 주신다면 제가 읽지 못하게 될 것이 아쉬워 저의 개인 메일로 보냅니다. 

우연히 *** 인턴 지원 공고를 보고 이끌리듯 지원하여 벌써 4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네요. 저에게는 퇴사라는 단어보다는 '졸업'이라는 단어가 더 와 닿습니다.

입사 후 잠 못 이루고 열정적으로 일했던 시기도 있었고, 출근이 끔찍했던 시기도, 빨리 회사에 가고 싶어 두근거리던 시기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동안 참 많이 부족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에서 드문 자원이라며 어여삐 봐주신 분들, 애정 어린 독려, 피드백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아쉬움은 이 곳의 훌륭하신 선배님들, 동기님들, 후배님들과 더 자주 교제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저는 앞으로의 제 삶에 대해 고민하고 여러모로 도전해보는 긴 호흡의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시간이 흘러 도전하는 것에 대해 용기가 나지 않는 순간이 오기 전, 두려움이 앞서지만 용기를 내보기로 했습니다. 어느 곳에 있더라도 ***에서 배운 것을 잊지 않고, 제 인생의 중요한 가치인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고민하는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하겠습니다. 

퇴사를 앞두고 모든 분을 직접 만나 뵙지 못한 점 양해 말씀드립니다. 회사에서는 자주 못 뵈었어도, 저와의 대화나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나 기쁜 마음으로 사우님들과 연락하며 지내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2019년 9월 9일



아직은 두렵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결정에 훗날 후회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 확실한 것은 이번 기회를 통해 저 자신의 선택을 사랑할 줄 아는, 지금보다는 조금 더 단단한 사람으로 성장해보려고 합니다.이것저것 도전하고 싶은 것들도 하나씩 해나아가려고 합니다. 퇴사 성장기 지켜봐 주세요. 


회사를 '졸업'하던 날, 뇌리에 맴돌았던 영화 <시네마천국> 의 대사를 끝으로 글을 마치겠습니다.



돌아보지도 말고, 편지 쓰지도 말고, 향수병 따위는 너한테 없는 거야.
무슨 일을 하든 네가 선택한 일을 꼭 사랑하렴.
영사실을 사랑하던 꼬마 토토의 철부지 시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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