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상 내가 4050이 되고 나니, 진정 인생의 정점은 육체적으로 가장 왕성한 20~30대가 아닌, 40~50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종종 든다. 그렇다. 피할 수 없는 자연의 태풍과 천둥과 벼락을 견뎌낸 시간은 ‘성숙’이라는 열매를 영글게 했다.
육체적으로 시간의 흐름이라는 자연법칙을 거스를 순 없지만, 성숙한 중년은 더 이상 인생의 내리막길이 아닌, 삶의 지혜와 균형 잡인 판단력이 정점에 이르는 인생의 찐 전성기다. 이렇게 지난날들을 되돌아보는 사유를 통해서 중년만이 가질 수 있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크나큰 숨은 매력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신성(神聖)함이다.
• 4050의 성숙으로부터 발견한 ‘신성(神聖)’
시간이 선물한 4050의 성숙은 ‘신성’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여기서 말하는 ‘신성’은 어느 종교와도 전혀 무관하다. 사실 신성하지 않은 사람은 없고, 육체를 갖고 있는 모든 인간에게는 누구나 신성함이 깃들여 있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중년’의 ‘신성’이라 표현한 것은 자연스레 노화라는 순서를 밟아가는 육체와는 달리, 정신의 성장에는 끝이 없는 중년의 존귀함, 고귀함을 강조하고 싶은 의도의 표현이다. 사람은 그 존재 자체로 누구나 신성하지만 세월이 던져준 비바람을 견뎌낸 단단한 내공에 물리적 시간의 힘이 곱해져서 이뤄낸 중년의 신성함은 또 다른 차원의 쾌거이기 때문이다.
• 4050의 새로운 이름 ‘섹시한 청춘’
그래서 나는 4050을 ‘섹시한 청춘’으로 새롭게 재정의하고 싶다. 이렇게 단어를 재정의하는 이유는, 우리가 묘사하는 현실을 그대로 창조하는 언어의 힘 때문이다.
40대에 접어든 옛 연인이 우연히 만나 7일간의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사랑이 남긴 추억을 돌아보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가 있다. 영화 제목이 ‘두 번째 스물’이다. 영화 속 40대가 된 자신의 나이를 한탄스럽게 말하는 엄마에게, 딸이 엄마의 나이를 ‘두 번째 스물’이라고 능청스럽게 말하는 순간, 엄마의 얼굴에 20대 소녀의 발랄한 미소가 가득해진다.
우리가 마흔을 ‘중년’이라고 명명하는 순간 그 단어가 주는 모종의 이미지, 이를테면 일생에서 반쯤을 살았다는 의미로 이제부터는 ‘인생의 내리막’이다라는 이미지에 갇히게 된다. 하지만 마흔을 ‘두 번째 스물’이라 명명하는 순간, 영화 속 마흔 살이 된 엄마처럼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스물이 가진 도전, 젊음, 시작, 역동성을 떠올리며 미소 짓게 된다.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여기서 말하는 ‘섹시’는 단순히 외모나 특정 매력에서 오는 성적 매력이 아니다. 내면의 깊이와 지혜, 성숙함이 주는 다른 차원의 섹시함을 말한다. 결국 자신의 빛이 퍼져 다른 사람에게 불꽃이 되는 것! 그것이 내가 말하고 싶은 ‘섹시한’ ‘신성함’이다. 또한 섹시한데 청춘이 아닐 수는 없으므로 4050은 당연히 ‘섹시한 청춘’이다.
이제는 4050을 단순히 ‘중년’이라 명명하기보다, “섹시한 청춘”이라는 프레임으로 바라보면 어떨까? 무엇보다 스스로가 지금까지 인생이 내준 힘겨운 숙제를 잘 마치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자신을 토닥토닥 감싸주고, 인정해 주면서, 자신의 가치를 재인식할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는 신의 한 조각이다”
사람은 단순히 생물학적 존재를 너머, 더 큰 목적과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존엄하고 신성한 존재이리라. 그리고 육체가 겪는 모든 경험과 배움은 우리 안의 신성을 드러내기 위한 과정이리라.
내면의 본질과 직면하고, 자기 자신과 화해하며, 신성한 가치를 실현해 가는 여정 속에서 우리는 분명 더 단단해지고, 더 성장하고, 세상에 더 유익한 존재가 되어 갈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