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점이나 사주, 철학관의 이야기들을 믿지 않는 편이다. 당장 내일 일어날 일도 예측하기 어려운데, 어떻게 그걸 미리 알고 행동을 하고 미래를 바꿔보려 할 수 있을까. 과학적인 근거가 없음에도 종종 신점사주나 철학관 사주의 말들을 들으면 제법 그럴 듯하다. 사람들의 점보고 난 후의 후기를 들으면 재미도 있고 나의 운명, 미래도 궁금해서 보러 갈 법도 하지만 결국은 궁금하기 까지만 하고 끝난다. 더 이상 나를 자극하진 않는다.
어느 누구는 나에게 ‘네가 인생에 대해 크게 걱정과 고민이 없어서 그래’라고 하기도 했지만, 나라고 고민이 없었겠나. 스무 살부터 부모님과 떨어져 살면서 힘들고 괴로웠던 경험도 무수히 많았다. 사주를 안 믿는다고 하는 지금의 나도 과거엔 툭하면 사주 보러 다녔었다. 연 초에는 연중행사로 늘 보러갔었고 그 외에도 무슨 큰일이 생기거나 어떤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할 때도 보러 갔었다. 용하다고 하는 곳에도 3개월 전에 미리 예약해, 보러 간 적도 있었다. 또 한 두 번보고 잘 맞았다고 생각되는 곳에는 몇 번을 다시 가기도 했었다. 지인을 통해 족집게처럼 잘 맞춘다는 분의 연락처를 알아놨다가 전화로 사주풀이를 본 적도 있었다. 보고 나면 가장 먼서 ‘아’ 하는 깊은 탄식과 함께 묵은 스트레스가 풀려나가면서 머릿속이 맑아진다. 그리고는 다음에 내가 무엇을 하면 좋은지 대강 길이 잡히고, 웃음이 난다. 미리 내 길을 알아서 다행이고, 나쁜 길로 빠지지 않아서 더 다행이란 생각을 하며 사주 보길 잘 했다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그랬던 내가 한 순간에 사주보기를 끊었다.
어떤 큰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갑자기 어떤 한 생각이 들었었다. 내가 이 사주보는 것에 제법 많은 돈을 들였었다. 내 앞날을 잘 이야기해주고 주의 해야 할 것도 알려줘서 좋았기도 한데, 다시 생각해보면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은 이미 내가 알고 있거나 단번에 말할 수 있는 답은 있었는데 내가 인정하기 싫어하기도 했던 부분이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점쟁이가 어떤 말을 하던 간에 내가 아는 것 중에 하나를 말하는 것이기에 더 특별할 것도 없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서 어느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자 했었고, 도움을 줄 사람이 ‘미래를 알 수 있다’는 것 하나로 타인의 말을 더 믿으려 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점쟁이든 철학관의 사주 보는 사람이든, 나나 우리 모두 인간이기에 미래를 예측하긴 불가능하다. 설사 안다고 한들 변수가 많은 것 또한 인생이라 미래를 향한 길이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 무엇을 시작할 때 할지 말지 여전히 고민을 엄청나게 하지만 진짜 하려고 했을 때 망설여지면 하지 말자, 혹은 하고 난 다음 그때 후회하자 라고 스스로 결론지어 버렸다. 또 어떤 나에게 힘든 일이 닥쳤고 이 어두컴컴하고 미치도록 힘들어도 나는 죽지 않고 내 자리에서 내 것을 하며 살아 있고 언젠가는 끝이 보이리라 믿기로 했다. 이런 많은 과정에서 분명 남은 교훈이 있기 마련이고 나는 그 틈에서 어느 샌가 성장하고 있었다.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누가 내 미래를 가지고 왈가왈부 하겠나, 나는 사주보는 대신 나를 더 믿기로 했다.
친정엄마가 사주보러 안가냐고 물어보셨다. 이제 더 이상 안 간다는 나의 말에 엄마 적잖이 놀라셨다.
“돈을 너무 줬어. 돈이 아까워서 이제 사주 보러 안 가려고.”
철학관, 점집에 주는 돈, 이제 나한테 더 쓰기로 했다. 그 돈이면 책을 살 수 있고 커피를 몇 잔 더 마실 수 있는지 생각만 해도 행복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