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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아책방 Nov 09. 2019

냉장고를 지키는 터줏대감

큰일 났다. 김장철이 다가온다.



냉장고 문을 열어 본다. 큰 갈색 통이 한 통, 두 통, 세 통. 냉장고 선반 두 칸을 지키고 있다. 이제 올해의 새로운 갈색 통이 더 들어가야 하는데, 자리가 있나 찾아보니 기존의 갈색 통을 먼저 비워야 들어갈 수 있을 것만 같다. 버릴 수도 없고 어떻게 활용을 해 볼까 머리를 굴려 본다. 



듬성듬성 썰어 냄비에 넣고 참치를 넣거나 스팸과 소시지를 넣어 찌개를 해 먹는다. 돼지고기 넣어서 찌개 해 먹는 것도 당연히 맛있다. 그렇게 먹어도 남는 김치. 이제 묵은 김치를 씻어서 참기름에 볶아서 김밥에 넣어서 먹기도 했다. 깍두기는 잘게 썰어서 김치볶음밥 해 먹는데 예상외로 별미다. 된장찌개에도 묵은 김치를 씻어서 넣어 먹으면 맛이 더욱 깊어진다. 새로운 된장찌개의 탄생이다. 



남편과 여행을 다녀오면 늘 김치찌개를 끓여 먹는다. 해외든 국내 어디든 간에 집에 왔음을 알리는 건 보글보글 김치찌개 끓이는 소리와 냄새였다. 해외여행 갔다가 와서 한식을 찾는 건 이해가 되는데, 춘천을 가든 제주도를 가든 국내 어디를 여행하고 와도 그날 저녁밥은 김치찌개였다. 몸이 피곤한 날에도 김치찌개를 찾는다. 뜨끈한 김치 국물과 잡곡밥 한 입 야무지게 먹으면 몸과 마음이 편안해진다. 바깥에서 온갖 잡식으로 배를 채웠다가 집에 오면 왠지 헛헛해지는데 김치찌개 국물 한 숟갈이면 배가 옹골지게 든든해지는 기분이다. 그래서일까, 냉장고에 다른 식재료가 없어 텅텅 비어 있어도 김장김치만 있으면 먹고사는 데 문제없다고 생각했다. 



이번은 다르다. 많아도 너무 많다. 작년 입덧을 시작으로 냄새 맡기부터 힘들어서 갈색 통 뚜껑조차 열어보지 않고 있었다. 입덧이 끝나고 먹어보고 있다가, 아기를 낳고 나니 수유한다고 먹지 않았다. 그러니 남아 있는 김치가 많을 수밖에… 그래도 볶아서 먹고 삶아서도 먹고,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고 할 수 있는 방법들을 다 동원해서 해 먹고 있다. 처음으로 시도해보는 방법도 생겨서 김치로 인해 내가 할 줄 아는 요리가 하나씩 늘어난다. 



친정 엄마는 너무 안 먹을 것 같으면 버리라고 한다. 냉장고에 자리를 많이 차지하고 있기도 해서 버리려고 했지만 차마 버릴 수 없다. 이 김치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건데. 배추를 사서 소금에 절이고 양념을 만들어 배춧잎 사이사이에 바르는 이 모든 과정이 오래 걸리기도 하고 온갖 노력과 많은 손을 필요로 한다. 재료도 배추부터 새우젓, 찹쌀, 고춧가루 등등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상당히 필요하다. 임신하기 전에는 시댁에서 김장할 때 남편과 가서 김장을 돕고 김치를 받아서 왔다. 친정 김장할 때도 마찬가지로 함께 만들고 한 통씩 받아서 왔다. 어릴 때부터 맞벌이하시는 부모님은 늘 바쁘셨고, 그 와중에도 늦게까지 힘들게 김장을 하고 계시는 모습을 보면 굳이 이렇게 까지 하면서 만들어야 할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일 년 동안 먹을 김치를 담그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냉장고에 많이 남았다고 투덜대기는 해도 김치는 우리 집 식단을 책임지는 대들보 같은 역할을 하고 있기에 항상 고맙다. 볶아 먹고 끓여먹고, 하나도 남길 것 없는 김치, 다가올 새 김장김치가 와도 괜찮다. 묵은 김치는 시고 팍팍 익은 맛으로 먹고, 새 김장김치는 생생하고 시원한 맛으로 고슬고슬 금방 지은 밥에 하나 얹어서 먹으면 된다. 반찬이자 하나도 남길 것 없고 버릴 수 없는 귀한 음식이다. 

어서 와라, 김치야. 고마운 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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