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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서 Apr 04. 2018

 교사도 학생도 사랑이 필요하다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 “하밀 할아버지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있나요?”


2017년 1학기 중3 아이들의 책읽기 수업이 끝날 무렵이다. 다음 학기 수업에선 책을 내가 고르기 보단 아이들이 원하는 주제에서 선정하고 싶었다.

“얘들아, 다음 학기에 어떤 주제로 책을 읽어볼까?”

난 하나마나한 질문이란 걸 정확히 1초 뒤에 깨달았다.

“사랑이요.” 한 여자 아이가 그러더니 바로 연달아 터져 나온다. “사랑 소설 읽고 싶어요.” “사랑 영화도 보고 싶어요.”

아뿔사 이렇게 당연한 답이었구나 싶었다. 이렇게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튀어나오는 건 얼마나 자주 생각을 할까도 싶었다. 학교가 기숙학교에 남녀 공학인지라 대안학교임에도 연애를 금지로 하고 있었다. 본래 무엇을 열심히 하도록 하는 방법은 그걸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라고 했던가. 막았기에 더욱 열심히 그리워 했는가 싶기도 했다. 나는 아이들 대답을 듣고 심호흡을 한번 한 후 대답했다.

“그래 다음 학기는 사랑을 주제로 책을 읽어보자.”


: 사랑은 주고 받아야 한다.


사랑 이야기는 참 무궁무진하다. 어디에 가져다 붙여도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 사랑이라는 단어 아래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도 아마 없을 거다.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사랑 이야기로 수업을 한다니 아이들의 눈빛이 초롱초롱하다. 물론 소설 한 페이지를 읽자마자 훅 하고 꺼져버린 지선이의 모습도 사랑스럽다.


에밀 아자르의 소설 <자기 앞의 生>에서 모모라는 10살 아이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를 길러주는 로자 아줌마는 침대 밑에 히틀러의 사진을 두고 힘들 때 그 사진을 보며 힘을 얻는 유대인이다. 악명 높은 유대인 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의 경험 덕분인지 생(生)의 의지가 필요할 때 그의 사진을 애용한다. 아랍 아이와 유대인의 만남은 참 어울리지 않지만 사랑이란 단어는 그 모든 것을 덮는다.


“하밀 할아버지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나요?”모모 주변에 앞이 잘 보이지 않지만 지혜의 언어로 모모의 물음에 답을 해주는 하밀 할아버지가 있다. 어느날 모모는 자신을 사랑한다 믿었던 로자 아줌마가 우편환(월급)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이미 부모로부터 분리를 경험한 아이에게 두 번의 분리 경험은 참 가혹하다. 책 모퉁이에 ‘불쌍한 모모’라 쓴 낙서가 보인다.


지혜의 하밀 할아버지가 좋은 답을 해주면 싶은데 의외의 답을 내어주었다.

“그렇단다.”

할아버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울음이 터져나왔다.

모모는 사랑 없이 살 수 없다 생각했다. 그렇기에 확인받고 싶었다. 자신도 사랑 없이 살 수 있다 믿었다면 묻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물었고 결국 울음이 터졌다. 할아버지는 왜 이런 답을 했을까? 아마도 사랑 없이 살아졌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살아진 걸 정말로 산다고 말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고 싶다.


<백만 번 산 고양이>라는 그림책이 있다. 백만 번을 살 동안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았던 고양이다. 서커스 단장의 고양이 일 때엔 마술 쇼 도중 실수로 몸이 잘려 죽었다. 해적의 고양이일 때엔 수영을 하지 못해 물에 빠져 죽었다. 주인들은 모두 슬퍼했지만 고양이는 다시 태어났다. 그런 고양이가 하얀 고양이를 만났다. 백만 번이나 살았다고 자랑을 해도, 빙그르르 재주 넘기를 해도 하얀 고양이는 “그러니?”라고 답을 할 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백만 번이나 산 고양이는 그저 하얀 고양이 곁에 머물렀고 둘은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자기 온 생에를 주어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할 만큼 그들을 사랑했다. 어느 날 하얀 고양이가 죽었다. 백만 번이나 산 고양이는 몇날 며칠을 울었다. 그리고 곁에서 함께 숨을 거두었다.

이 그림책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마무리를 짓는다.

‘그리고 다시는 태어나지 않았답니다.’


사랑을 아무리 받아도 사랑을 주고받지 않으면 생(生)은 백만 번이나 있어도 사랑한 한번의 생(生)보다 가치가 없다는 거다. 하밀 할아버지의 답에 이 그림책이 어느 정도 변명이 되어 주었다.


: ‘교사(어른)-학생’, 주고받는 사랑이 필요하다.


하밀 할아버지는 사랑 없이 살 수 있다고 모모에게 말했다. 살아졌다는 건 견딘 것이지 않을까?

선생님이 되어 행복한 순간은 아이들이 나를 향해 활짝 웃어줄 때다. 나는 여러 모습으로 여러 장소와 장면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가장 많은 시간과 가장 많은 사람을 만나는 장소는 학교다. 교실에 들어서면 힘이 쭉 빠지거나 힘을 잔뜩 얻거나 둘 중 하나가 된다. 아이들의 눈빛이 초롱초롱해서 바라봐주면 나는 사랑받고 있구나란 느낌이 든다. 그러나 물어도 대답을 하지 않거나 쳐다보지도 않는다면 그땐 참 미약하고 서투른 사람이 된다. 왜냐하면 난 교실이라는 장면 속에서 유일한 어른이기 때문이다. ‘유일한 어른’이기에 당연히 ‘사람’으로 받고 싶은 것을 누리지 못할 때가 많다. 가장 큰 것이 사랑받을 권리이다. 그건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많은 선생님들을 겪으며 여러 학생들 속에서 튀지 않으면 관심과 사랑을 받기란 쉽지 않았을 거다. 선생님이 유일한 어른이기에 ‘가르치려 드는’ 모습들만 자주 겪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반대의 입장이 되어본다면 수십명의 아이들 앞에 놓여 어쩌면 어른이길 강요받고 있는 것도 선생님의 한 모습이리라.


“한번은 식료품점 앞에서 진열대 위의 달걀을 하나 훔쳤다. 주인은 여자였는데, 그녀가 나를 보았다. 나는 가게 주인이 여자인 곳에서 훔치기를 좋아했는데, 그 이유는 내 엄마도 틀림없이 여자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

“너 참 귀엽게 생겼구나!”

처음에 나는 그녀가 나를 잘 구슬러서 달걀을 도로 찾으려고 그러는 줄 알고 호주머니 깊숙이 든 달걀을 더 꼭 쥐었다. 그러나 그녀는 일어서서 진열대로 가더니 달걀 하나 더 집어서 내게 주었다.그러고는 나에게 뽀뽀를 해주었다. (……)

나는 손에 달걀을 쥔 채 거기에 서 있었다. 그때 내 나이 여섯 살쯤이었고, 나는 내 생이 모두 거기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겨우 달걀 하나뿐이었는데……


모모가 관심을 받기 위해 하는 모습을 보면 꼭 나를 보는 것 같다. 어른이지만 10살의 모모와 다를 것이 하나 없다. 겨우 달걀 하나에 온 생이 거기 달려 있다고 말을 하는 모모이다. 나도 역시 수업시간 아이들의 눈빛 하나에 온 생이 거기 달려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담임을 맡고 있는 아이들의 경우엔 더욱 그렇다. 어쩌면 떡볶이 하나로 환심을 사며 “선생님 짱”이란 소리를 듣는 것도 모모가 달걀 하나로 얻은 느낌과 같은 것을 받고 싶어서일 거다. 어른이고 선생님이기에 앞서 ‘사랑 없이 살 수 있나요?’라고 묻는 ‘사람’인 셈이다.

아이들도 그렇다. 물을 주는 느낌이란 이런 걸까? 관심과 사랑을 기울이면 일년 새에 쑥쑥 크는 느낌이 든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도처에 널린 게 풀꽃이지만 풀꽃 하나하나의 생은 오롯이 하나뿐인 생이다. 그래서 잡초나 풀꽃이라 불리기보다 ‘예쁨’을 받고 싶은 풀꽃인 거다. 하지만 이 시를 대할 때면 단발마 같은 아이들의 비명이 들린다. ‘나를 자세히 보아 주세요.’, ‘오래 보아 주세요’라는 외침이다. 나도 그렇듯이 사람을 평가내리길 좋아한다. 누군가를 정확히 규정할 때 내 스스로가 또렷해 보인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선생님이 아이들을 잘 파악한다는 느낌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이들에 대한 판단은 유보할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자세히 보고 오래 보면 처음 본 모습과 다른 맑은 얼굴이 드러난다. 아이들이 내 얼굴을 자세히 오래 보아주길 바라듯이 말이다.


                               <옛 연인> - 마리아 아브라모비치


2010년 뉴욕 모마 미술관에서 행위 예술가 ‘마리아 아브라모비치’의 작품이 열렸다. 22년간 헤어진 옛 연인을 재회하여 서로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장면이다. ‘가만히 바라봄’ 그 안에 어떤 소통이 지나갈까? 그저 바라만 보는 데에도 22년의 시간을 넘는 깊은 만남이 이루어질 것만 같다.


나는 얼마나 아이들의 얼굴을 오래 자세히 바라보는가? 그리고 아이들은 나(선생님)의 얼굴을 얼마나 오래 바라보는가? 사람이 사랑없이 살 수 있는지 물을 때 교실 안에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과연 함께 살고 있는 것은 맞는지 오히려 되물어야 한다. 천천히 오래 하루에 한명씩 자세히 바라보려 해본다.


: 다시 사랑 없이 살 수 없는 확신을 하며


“제가 모모예요, 할아버지.”

“아, 그래, 그래. 미안하구나. 이젠 눈이 보이질 않아서…….”

“잘 지내셨어요, 하밀 할아버지?” (……)

“하밀 할아버지,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도 살 수 있나요?”

“난 쿠스쿠스를 무척 좋아한단다, 빅토르야. 하지만 매일 먹는건 싫구나.”

“하밀 할아버지, 제 말을 못들으셨나봐요. 제가 어릴 때 할아버지가 그러셨잖아요, 사람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그의 얼굴이 속에서부터 환하게 밝아졌다.

“그래, 그래. 정말이란다. 나도 젊었을 때는 누군가를 사랑했었지. 그래, 네 말이 맞다, 우리…….”


네 살이나 더 먹은 모모는 이제 로자 아줌마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았다. 그러나 뇌혈병으로 죽은 로자 아줌마의 곁을 화장하고 향수를 뿌려가며 지키고 있다. 잠시 밖에 나와 하밀 할아버지를 만났다. 그리고 다시 예전의 물음을 던졌다. 그런데 물음이 조금 바뀌었다. 예전에 하밀 할아버지는 분명 사랑 없이 살 수 있다고 했는데 모모는 반대로 물었다. 할아버지의 답도 반대로 나왔다. 그런데 답은 반대였어도 마음은 진실이다. 속에서부터 환해지는 할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단다 모모야.”였다. 로자 아줌마의 삶을 모모가 지켜왔고 모모의 삶을 로자 아줌마가 지켜왔다. 둘은 사랑의 관계로 서로를 지켜왔다. 산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한다는 것은 산다는 것이다. 그 사이에 급식을 나누어 먹고 수업을 하고 농담을 던지고 혼쭐을 주고받고 복도를 걸어가다 이름을 부른다. 그게 선생님으로 살아가는 나의 생이고 나의 사랑이다.


한 학기 사랑에 대한 신화도 읽고, 그림도 보고, 책도 읽으며 고1 아이들 수업이 끝나갈 무렵 한학기만큼 자란 동희, 강호, 선경이와 같은 아이들을 바라본다. 부쩍 몸도 마음도 자랐지만 그렇게 책을 읽고 사랑에 대해 토론했음에도 결론은 ‘모르겠다’로 끝을 맺는다. 사랑은 모르겠다. 그 아이의 마음도 모르겠다. 내 마음도 모르겠다. 이게 사랑인지 모르겠다. …… 그래서 생은 모르는 것 투성이에 궁금하고 호기심 가득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딘가에 또 사랑들이 내 생을 가득 채울 것을 기대하며 판도라의 상자를 닫는다.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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