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 F.스콧 피츠제럴드
"너무, 너무 아름다운 셔츠들이야." 그녀가 흐느꼈다. 두터운 셔츠 더미에 파묻혀 그녀의 목소리가 띄엄띄엄 들려왔다.
"너무 슬퍼. 한 번도 이렇게. 이렇게 아름다운 셔츠들은 본 적이 없거든."
<위대한 개츠비>에서 '데이지'라는 인물은 영국제 셔츠를 사랑하는 여자입니다. 이 문장만 본다면 분명 데이지는 이름처럼 머리에 꽃을 꽂은... 그런 여자가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저도 IT기계를 좋아하지만 **베스트 샵이나 **스토어 한가운데서 "너무 슬퍼~ 이렇게 아름다운 태블릿은 본 적이 없거든."이라며 흐느낀다면 이해가 가실겁니다. 갑자기 저도 끔찍합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대공황이 오기까지 미국의 화려한 시기. 그 속에서 아직 여성에게 주체성이란 문제가 던져지지 않았을 때에 상류층의 화려한 삶만을 동경하는 데이지의 모습을 떠올려야 할 겁니다.
분명 이런 모습을 볼 때 데이지는 사랑할 가치가 있는 여인은 아닌듯 합니다. 개츠비는 데이지가 낸 차사고를 대신 뒤집어 씁니다. 그리고 그에 분노를 입어 살해 당하고 말지요. 개츠비의 장례식에는 아무도 오지 않습니다.
별다른 분노 없이 기억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데이지가 꽃 한 송이. 조전 하나 보내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참 양심도 없습니다. 아무도 모를테니 스스로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꽃 한송이 정도는 보낼법도 한데, 데이지는 시치미를 뚝 뗍니다. 개츠비는 데이지가 자신을 사랑했다 굳게 믿었지만 결국 빗나간 화살로 인해 자신이 대신 죽은 겁니다. 바보같은 죽음 아닐까요.
개츠비에게 데이지, 데이지에게 영국셔츠.
맹목적인 가치 추구는 경계를 사라지게 합니다. 결국 결론이 나야만 알게 되지요. 그렇습니다. 두 세계를 구분해버린 뒤 더이상 그 경계에 서보지 않는다면 느끼기 어려운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위대한 개츠비>에서도 서술자를 데이지와 개츠비 사이에 둔 것도 두 사람의 감정을 느끼기 위해서일 겁니다. 사과는 언제나 둥글고 단단하고 달콤한 건지, 청소년 때엔 꿈을 가져야 하는건지, 여성은 언제나 화장을 해야하는 건지 등 당연하다고 하던 것에 물어야 할 시간입니다.
저는 고3 아이들의 담임입니다.
공부는 꼭 해야 하는지 묻는 아이가 있네요. 공부를 해야한다는 건 알지만 아마도 어릴 때부터 당연히 그리고 꽤 당연하고 억지로 해왔기에 '공부'라는 단어가 '자유'라는 단어의 반의어가 되어버린듯 합니다. 고3이 더욱 그런 생각이 들 시기기도 하지요.
가치가 있는 교육엔 방향과 물음이 중요하다고 느끼는 시간입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