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했던 사람에게 선물한 책. 고병권 에세이, ⟪묵묵⟫
책 선물을 좋아한다. 좋은 책을 읽으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오지랖 때문이다. 좋은 책은 주변 사람들에게 꼭 추천을 하거나 선물을 해야 하고(선물이 책이라면 여러분들은 어떠신가요? 저만 짜릿한가요?) , 그게 아니라면 팔로워가 극히 적은 나의 SNS에라도 올려야 직성이 풀린다.
하지만 책 선물을 하는 건 개인의 성향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쉽지만은 않은데(흥미 없는 주제라면 책장 자리만 차지할 테니), 내 기준에 ⟪묵묵⟫은 그런 것을 따지지 않고도 선물하기 좋은 책 중 하나이다.
내가 ⟪묵묵⟫을 가장 처음 선물한 사람은 작년에 좋아했던 남자다. 그는 100km/h로 달려도 족히 며칠은 걸릴 만큼 책과 먼 거리를 형성하고 있던 사람이었기에, 제 아무리 내가 준 선물이라고 해도 읽을지는 미지수였지만, 혹시 '언젠가' 그가 '책 하나 읽어볼까' 하는 찰나의 마음이 들었을 때, ⟪묵묵⟫이 손 닿는 거리에 있어 그가 바로 읽을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나는 ⟪묵묵⟫을 그와 나누고 싶었다. 그와 ⟪묵묵⟫을 주제로 대화하고 싶었다. ⟪묵묵⟫은 나에게 조용하게 혼을 내기도 했고, 무심했던 사회의 면에 눈을 트이게 해주는 역할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시 그는 책의 표지도 넘기기 어려워했고(잠이 쏟아진다고) 끝내 ⟪묵묵⟫을 나눌 일은 오지 않았다. 물론 지금은 그에게 내가 기다렸던 '언젠가'가 왔을지, '책 하나 읽어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세상에 목소리 없는 자란 없다. 다만 듣지 않는 자, 듣지 않으려는 자가 있을 뿐.
작가는 장애인 야학(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성인을 대상으로 야간에 수업을 하는 비정규적 교육기관)에서 철학을 가르친다. 그러면서 그는 "인문학을 그저 복지시설에 위문품 전달하듯 들고 오는 지식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고 말한다. 게다가 "장애인들과 함께 공부하다 보면 장애인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제도와 관행이 무엇보다 우리 시대의 인문 지식과 맞물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나는 중학생 때 자폐증이 있던 친구와 같은 반이었던 적이 있다. 학생들은 그 친구를 대놓고 때리거나 욕하진 않았지만 그가 잘못하는 것이 있을 때면 "차라리 저럴 거면 장애인들끼리 있는 특수 시설 가는 게 낫지 않냐. 왜 일반학교를 왔냐"라는 말을 자주 했었다. 그리고 "내가 저렇게 태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내놓곤 했다. 나는 그 상황에 무엇이 오류인지 알지 못했다. 무엇이 차별이고 배제인지 몰랐다. 저들이 갈 수용시설이 잘 되어있다면 그걸로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묵묵⟫은 장애인 수용시설을 보고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지만 사실상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은 사람들. '우리'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니 '너희'는 거기 그렇게 갇혀있으라는 선고를 받은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나는 2017년 7월 1일, 춘천에 있는 장애인 수용시설로 봉사를 갔을 때를 떠올렸다.
큰 건물이었다. 깔끔하고 많은 것들이 갖춰져 있었다. 나는 세상 어디든 돌아다닐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곳을 보고 '이 정도 시설이면 괜찮네'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몇 시간의 봉사가 끝난 뒤에 지친 몸을 이끌고 나오며 '여기서 일하시는 선생님들 정말 고생이 많으시겠다. 얼마나 힘드실까.'라고 그분들의 노고만을 마음속에 담았다. 5살 된 아이가 얼마 전에 수용시설에 들어왔다는 것도, 그리고 그가 앞으로 몇십 년 동안 이 곳을 나가지 못할 것이란 것도, 이미 30년을 수용시설에서 보낸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도, 나는 무덤덤했다. 그저 '이 정도면 시설이 좋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부끄럽다.
장애인 탈시설화의 외침이 나온 지 8년이 넘어간다고 한다. 나는 "듣지 않는 자"였나, "듣지 않으려는 자"였나.
감히 해외여행을 떠난 기초생활수급권자를 위하여
2014년 보건복지부는 지난 5년간 기초생활수급자 중 해외여행을 다녀온 사람이 54만 명이라는 통계를 발표했다고 한다. 그 보도가 나가자 여론은 분노했다고.
하지만 작가는 "부정한 소득을 찾아냈다면 모를까 그가 수급권으로 받은 돈의 사용처까지 통제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기초생활 수급권은 말 그대로 '권리'다. 그가 그 '최소한의 생활'을 위해 준 돈을 밥 먹는 데만 쓰든, 책을 사보든, 여행을 하든, 자기의 인간다운 삶을 어떻게 규정할지는 그 권리자가 정할 문제라는 말이다. 밥 먹지 않는 곳에 쓰면 '어, 먹고살 만한가 보지?'라고 보는 것이야말로 '먹는 동물'로서만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 태도일 것이다."라는 일침을 날린다.
곧이어 "도덕이라는 이름의 돌멩이를 맞아야 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들이 아니라, 자기들의 탐욕은 멈추지 않으면서도, 감히 주제넘게 두 번이나 해외여행을 했다고 가난한 사람들 목줄을 쥐고 흔드는 사람들과 그들의 정부다."라는 의견을 밝힌다. 나 역시도 기초생활수급권자에 대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던 것을 부끄럽게 밝힌다.
자선가는 하고 싶은 일을 했으면서도 왜 분노하는가. 그가 원한 것은 행위가 아니라 행위에 대한 보상이었던가.
"철학자 니체는 선행을 통해 상대방을 소유하려는 자들의 책략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이럴 테면 자선가는 도움을 줄 대상, 그리고 고마움에 눈물을 흘리는 상상을 마치고 선행을 베푼다. 그의 상상대로라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 알아서 하는 대견한 행동. 이런 게 연출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게 구현되지 않을 때 우리의 자선가는 분노한다."
"우리는 사랑과 헌신으로 상대방의 품행에 대한 명령권을 얻었다고 믿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자선가, 박애주의자, 헌신하는 자가 느끼는 배신감에는 큰 무례함이 들어 있다."
나는 동티모르라는 나라에서 약 8개월간 봉사활동을 했었다. 즐겁게 생활한 적도 있었지만 힘든 일은 그에 곱절이었다. 무엇하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 곳에서 봉사를 하는데 학생들까지 따라주지 않을 때나 그들이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억울했다. '내가 지금 이 곳까지 와서 교육봉사를 하는데 애들은 고마워하지도 않고 제대로 하지도 않는구나' 하면서 말이다. 작가의 말처럼 나도 행위에 대한 보상을 상상했던 것이다. 내가 열심히 그들을 위해 봉사를 하면 그들이 고마움에 눈물을 훔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표할 것이라는.
하지만 그들이 그에 맞지 않는 태도를 보일 때면 실망하고 내 멋대로 정을 조금씩 떨어뜨렸다. 자원봉사자라고 스스로를 포장했지만, 내 행위에 대한 그들의 적절한 반응과 태도를 내가 좋을 대로 재단했던 것이다. '내가 어떻게 했는데!' 라고. 그 말속에 큰 무례함이 들어있는지도 모르고, 내가 이만큼 했으니 너희도 이만큼은 보여주라는 소리 없던 강요를 되돌아본다.
이 글을 쓰면서 1년 전에 읽은 ⟪묵묵⟫을 다시 읽었다. 역시나 좋은 책이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책의 기준들 중 하나는, 기존에 아무런 방해 없이 받아들인 사회적 통념에 대한 의문을 보여주는 책이다. 우리는 내가 직접 사고하고 사유하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사고의 많은 부분이 '원래 그러한 것, 사람들이 그러하다고 하는 것'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그게 정말 옳은 것인지 생각하고 짚어볼 시간이 많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런 사회에서 이런 책은 얼마나 귀한가. 이래서 독서를 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