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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록 Nov 29. 2020

새해맞이의 밋밋함

밀레니엄과 안현미의 시

돌이켜 보면 나는 새해맞이를 특별하게 보낸 기억이 별로 없다. 대부분 그냥 집에서 조용히 지냈다. 그나마 가장 기억에 남는 건 2000년에서 2001년으로 넘어가는 순간이다. 그때 나는 화장실 좌변기에 앉아 있었고, 볼일을 마치고 나온 뒤에야 어머니로부터 복 많이 받으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장장 2년에 걸쳐, 다시 맞을 수 없는 신세기와 밀레니엄의 순간에 신진대사와 씨름했던 것이다. 원래 계획은 타이밍 좋게 빨리 끊고 TV로라도 제야의 종소리를 듣는 거였는데 내 위장은 정말 타이밍 좋게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남은 건 용쓰는 데 소비한 열량과 땀뿐이었다. 시간을 스틸컷으로 자른다면 내게 2001년 1월 1일 0시 0분 0초는 위태로운 자세로 폐기물을 분출하는 세기말적 장면일 수밖에 없다. 그때의 배변 활동은 정말 극적이었다. 소극과 비극 사이 어디쯤이랄까.




비굴 레시피


재료

비굴 24개 / 대파 1개 / 마늘 4알

눈물 1큰술 / 미증유의 시간 24h


만드는 법

1. 비굴을 흐르는 물에 얼른 흔들어 씻어낸다

2. 찌그러진 냄비에 대파, 마늘, 눈물, 미증유의 시간을 붓고 팔팔 끓인다

3. 비굴이 끓어서 국물에 비굴 맛이 우러나고 비굴이 탱글탱글하게 익으면 먹는다


그러니까 오늘은

비굴을 잔굴, 석화, 홍굴, 보살굴, 석사처럼

영양이 듬뿍 들어 있는 굴의 한 종류로 읽고 싶다

생각컨대 한순간도 비굴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으므로

비굴은 나를 시 쓰게 하고

사랑하게 하고 체하게 하고

이별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고

당신을 향한 뼈 없는 마음을 간직하게 하고

그 마음이 뼈 없는 몸이 되어 비굴이 된 것이니

그러니까 내일 당도할 오늘도

나는 비굴하고 비굴하다

팔팔 끓인 뼈 없는 마음과 몸인

비굴을 당신이 맛있게 먹어준다면


_ 안현미, <곰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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