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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록 Nov 28. 2020

일상, 어떤 모호함

겨울 풍경과 이민하의 시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하는 게 한결 편해졌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하는 게 두려워서 적당히 에두른 적도 많았다. 모든 사안과 현상에 나름의 관점과 태도를 보이는 것은 그 자체로 매력적인 일이지만, 살다 보면, 어떤 건 반드시 모호한 채로 남았다. 그 모호함을 선명하게 밝히는 일이 꼭 좋기만 한 건 아니었고. 이를테면 나는 사소하고도 중요한 일상까지 일일이 무엇을 어떻게 선택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편인데, 가끔은 뭐가 좋은지 나조차도 모를 때가 많기에 어영부영하곤 한다.


이미 너무나도 많은 선명함과 선택을 강요받는 게 아닐지, 어떻게든 분명한 입장을 캐내고 싶어서 못 견디는 건 아닌지, 어떤 모호함은 그냥 알 듯 말 듯 놔둬도 되지 않을지, 되뇐다. 그저 내 시간이 적당히 무르익으면 저절로 가시기도 하고, 때로는 어디론가 사라지거나, 자연스레 밝아지기도 할 텐데. 방정식처럼 모든 게 딱딱 들어맞아야 할 필요는 없을 텐데. 환한 모호함.



어느 해 겨울, 누군가를 기다리느라 거리의 커피숍 앞에 서 있었다. 전면 유리창 너머로 카드 게임을 하는 세 가족이 보였다. 엄마 한 장, 아빠 한 장, 아들 한 장 카드를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그들의 입가는 엷게 벌어지고, 이후로도 다물어지지 않았다.


또 언젠가는 초등학교 앞 분식집을 지나가는데, 떡볶이 한 접시를 놓고 나눠 먹는 여자애 몇몇과 멀리 떨어져 혼자 어묵을 먹는 남자애가 서로 말없이 있다가, 여자애 중 하나가 너 혼자 왔으면 이리 와서 같이 먹자, 하고 말하자 오케이 콜, 하며 남자애가 무심한 듯 시크하게 여자애들 자리로 가더니 서로의 음식을 나눠 먹는 모습을 보았다.


살다 보면 마주치는 소소한 풍경들, 나와 상관없지만 내 기억에 남은 이미지들, 시간과 기억이 휘발되지 않도록 삶의 물기를 터 주는 연결고리들. 삶의 비정함에 지쳐 회의와 환멸에 시달릴 때가 많은데, 누가 알아봐 주지 않아도 스스로 훈기를 건네는 그런 장면들이 있기에 사는 일의 속도를 내 시간으로 품을 수 있었다.





일요일


없는 목을 길게 빼고 마술사는 카드를 돌리죠.

여섯 개의 트렁크가 왁자지껄 세탁물처럼 토해낸

여섯 명의 이구동성.


가스불 위에 축축한 눈을 펼쳐놓고 모두 잠이 들죠.

트렁크를 나르고 망을 보던 문지기가 발을 동동

구르며 탄내를 끌 때까지.

창문은 수다스런 연기의 확성기. 화들짝 깨어난

화요일의 사람이 그을린 눈에 참기를 척척 발랐죠.

꼬리를 살랑살랑 먼지들이 짖어댑니다.

비닐을 다 떨어낼 때까지 물구나무서는 모래계단.

냉장고엔 초경을 쏟는 소녀들, 사과잼처럼

침대에 펴 바르고 어둠은 포크를 돌리죠.

눈을 덜 말린 사람들은 아직 프라이팬을 뒤집고

마술의 효력은 이제부터랍니다.

없는 손을 얼키설키 트렁크들은 카드를 뒤섞고

카드를 읽지 못한 마술사가 아직 돌아가지 못했는데

없는 얼굴로 우리는 껌을 뱉듯

화면을 끄죠.


_ 이민하, <음악처럼 스캔들처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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