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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한현재 Jan 08. 2019

사랑이라는 폭력

# 사랑과 폭력


(개인적으로 '사랑, 우정'이 폭력이라는 걸 잘 보여주는 영화.)


  일반적으로 ‘사랑’이라는 단어와 ‘폭력’이라는 단어는 가장 양 극단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때때로 사랑은 폭력일 수 있고, 그것을 감내해내는 것이 또한 사랑일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폭력은 사랑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사랑과 폭력의 역설적인 관계는 좀처럼 잘 와 닿지 않지만 우리는 현실에서 그것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누군가를 끔찍이 사랑하는 스토커나 여자 친구를 사랑한다면서 때리는 남자, 그리고 아이를 끔찍이 사랑한다면서도 아이를 궁지로 내모는 부모들. 누가보아도 이것은 명백한 폭력임에도 그들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한다. 나는 여기서 그들을 옹호하거나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너무나 확신에 차 있는 그들의 ‘사랑’에 호기심이 생길 뿐이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다.”라는 이 말은 우리가 자주 쓰는 말 중 하나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랑과 폭력이 같은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지독한 스토커라 하더라도 무관심한 이성을 스토킹을 하지 않는다. 아무리 여자에게 폭력적인 남자라 하더라도 무관심한 여자에게 주먹을 휘두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극성인 부모라도 옆집아이에게 높은 성적을 강요하지 않는다. 이처럼 대부분의 폭력은 무관심이 아니라 사랑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정말 ‘사랑’이라는 것에 ‘폭력’이라는 속성이 담겨있는 것일까.


# 폭력의 원천(1), 배타적 소유욕



  ‘사랑’이라는 단어가 쓰이는 맥락을 살펴보면 참 재미있다. “나는 정말 치킨을 사랑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누구보다 닭을 많이 죽인 사람일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람은 치킨을 사랑한다면서 닭에게 가장 큰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일반적 통념과 다르게 ‘사랑’은 상대방에 대한 ‘희생’과 ‘배려’보다는 ‘폭력’에 가깝다. 이는 사랑이 그 상대에 대한 배타적 소유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을 내 곁에 두고 싶어 한다. 왜냐하면 그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너무나 행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행복은 그 사람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너무나 불완전하고 위험하다. 그 사람이 내 곁을 떠나면 곧바로 사라져버릴 뿐만 아니라, 나에게 그 행복에 버금가는 슬픔과 고통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어떻게든 그 사람이 내 곁을 못 떠나도록 그가 좋아하는 것들을 해주는 등 소위 ‘잘’ 해주는 것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 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지지하고 함께 좋아해준다. 평소 디저트 같은 건 입에도 안 대던 한 남자가 마카롱을 좋아하는 여자를 사랑하게 됐다면, 분명 그 남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카롱을 사랑하는 남자가 되어있을 것이다. 심지어 그 여자보다 더 마카롱을 자주 사먹게 될지도 모른다. 이처럼 어떤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이 사랑하는 것을 지지해주고 심지어 함께 그것을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예외가 있다. 그 여자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 어떤 것도 함께 지지해주고 사랑해줄 것 같은 남자라도 이것만큼은 허용이 안 된다. 여기서 우리의 ‘사랑’이 갖는 ‘배타성’이 드러난다. 


   위의 남자에게서 드러나듯 사랑은 그 사람에 대한 배타적인 소유에 대한 갈망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폭력은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일반적인 커플들 사이에서 서로에게 행해지는 것들을 잘 살펴보면 심각한 폭력에 해당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하루 종일 서로 연락을 하는 것이나 상대방이 누구를 만나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 하는 것, 그리고 무언가를 사주고 받고 하는 것 등. 이 모든 행동들을 만약 내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나에게 한다면 어떨까. 공포 그 자체일 것이다. 매일 전화가 오고, 내가 누굴 만나 무엇을 하는지 묻고, 계속 무언가를 선물이라고 보내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너무나 끔찍하지 않은가. 이처럼 이미 커플들은 서로에게 엄청난 폭력을 행하고 있다. 다만 그 폭력이 쌍방으로 이루어지면서 균형을 이루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러한 폭력을 충분히 감내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은 쌍방에게 행해지는 폭력을 서로 기꺼이 감내해내고 있는 상태, 우연히 그 폭력의 균형이 맞은 기이한 상태와 다름없다. 이러한 생각에 따른다면, 사랑은 결국 균형을 이루고 있는 폭력이고 그 균형이 유지되는 한 관계는 지속될 것이다. 문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랑의 강도가 약해지는 것이다. 폭력을 기꺼이 감내해내는 원동력인 사랑이라는 감정이 약해지면 그만큼 그 폭력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다가온다. 그동안 이끌어온 관성에 따라 그것을 감내해 나가긴 하겠지만, 점점 더 힘들어지게 되면 결국 이별을 결심하기에 이르게 될 수 도 있다.


# 폭력의 원천(2), 타자를 마음을 추측하는 인간의 인지적 메커니즘



   사랑의 배타적 속성 이외에도 사랑을 폭력적으로 만드는 것이 있다. 이는 사랑하는 사람이 결국 내가 알 수 없는 ‘타자’라는 점, 그리고 그러한 타자를 이해하는 인간의 인지적, 심리적 메커니즘과 관련이 있다. 이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전에 ‘타자’에 대해 깊이 사유했던 중국의 철학자 ‘장자’의 우화 중 하나인 ‘노나라 임금과 바닷새 이야기’를 살펴보자.    


너는 들어보지 못했느냐? 옛날 바닷새가 노나라 서울 밖에 날아와 앉았다. 노나라 임금은 이 새를 친히 종묘 안으로 데리고 와 술을 권하고, 아름다운 궁궐의 음악을 연주해주고, 소와 돼지, 양을 잡아 대접하였다. 그러나 새는 어리둥절해하고 슬퍼하기만 할 뿐, 고기 한 점 먹지 않고 술도 한 잔 마시지 않은 채 사흘 만에 결국 죽어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지 않은 것이다.-『장자』 「지락(至樂)」


   이 이야기를 통해 장자는 어떤 것을 말하고 싶었을까. 위의 이야기를 표면적으로만 이해하면 위의 노나라 임금은 바닷새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바닷새가 죽었고, 이러한 비극을 초래하지 않으려면 새를 기르는 방식 즉, 자연으로 풀어 주었어야 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너무 나이브하고 관념적인 해석이다. 우리는 이 이야기가 결국 인간의 일을 나타내는 우화임을 고려해야 한다. 노나라 임금이 새에게 음악을 연주해주고 좋은 음식을 대접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노나라 임금이 바닷새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임금이 과연 바닷새를 놓아 줄 수 있을까?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사랑은 배타적 소유를 위한 욕망이고, 상대방을 내 곁에 두려고 하는 욕망과 다름없다. 그런데 자연으로 풀어주라니, 이건 넌센스다. 이는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다른 사람에게로 보내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노나라 임금은 어떻게 했어야 했나.


   이 우화를 제대로 풀려면 노나라 임금이 그렇게 했던 이유에 대해서 한 번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위 이야기를 잘 살펴보면 노나라 임금은 정말 최선을 다했다. 좋은 음악을 연주해주고 좋은 음식을 대접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극은 상대가 ‘사람’이 아니라 ‘새’였다는 데서 발생한다. 노나라 임금은 사람인지라 사람의 관점에서 ‘최고’라고 생각되는 것을 주어 자신의 사랑을 표현했다. 그러나 그것은 완벽한 ‘타자’로 상징되는 ‘새’에게는 폭력이었던 것이다.


   노나라 임금이 바보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우리도 노나라 임금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우리는 대개 자신의 입장에서 타인의 마음을 해석하고 추론한다. 내가 이것을 좋아하니까 상대방도 좋아할 것이라고 추측하고, 내가 그것을 싫어하니까 상대방도 싫어할 것이라고 너무나 유아적으로 판단하곤 한다. 남녀 간의 관계에 대입해보면 쉽다. 남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방식, 즉 상대방이 자신에게 해주었으면 하는 방식으로 상대방에게 행동을 하며, 여자 또한 마찬가지이다. 


   대개 남자들은 여자 친구가 친구들이랑 놀러간다고 했을 때, 잘 놀다오라는 말과 함께 더 이상 연락을 안 한다. 이는 자신이 계속 연락을 하면 여자 친구가 친구들과 놀 때 신경 쓰여서 잘 못 놀까봐 배려하는 것이고 이는 남자 나름대로 사랑의 표현이다. 하지만 이것은 잘 생각해보면, 여자 친구가 자신이 친구들과 놀 때 자신에게 해주었으면 하는 방식의 행동이다. 여자의 경우는 어떨까. 여자들은 대개 남자친구가 친구들과 논다고 하면 지속적으로 연락을 한다. 이는 자신이 계속 상대방에게 신경을 쓰고 있고 챙기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여자 나름대로 사랑의 표현이다. 하지만 이것도 잘 생각해보면, 남자 친구가 자신이 친구들과 놀 때 자신에게 해주었으면 하는 방식의 행동이다. 이렇게 자신의 입장에서 추측하고 판단하여 상대방에게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행동을 했을 때, 어떤 결과가 발생하게 될까. 남자는 여자가 계속 연락하는 것을 자신을 배려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여자는 남자가 연락이 끊어진 것을 보고 자신에게 관심이 없고 자신을 챙기지 않는 다고 생각할 것이다. 결국 남자는 자신을 배려하지 않는 여자에게 화가 날 것이고, 여자는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여 이별을 결심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처럼 인간은 자신의 입장에서 타인의 마음을 추측하고 판단한다. 타자의 마음속을 들여다 볼 수 없기에 인간은 추측을 통해서 타인의 마음을 판단할 수밖에 없는데 그 때 기준이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노나라 임금도 마찬가지고 연락문제로 갈등을 빚었던 두 남녀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인간의 인지적 메커니즘과 관련이 있어 의식적으로 성찰하고 반성하지 않으면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때때로 그 과정에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폭력을 행하게 되기도 하는데 노나라 임금의 비극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타자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폭력을 행하게 되는 것, 이것이 장자가 노나라 임금과 바닷새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자하는 것이다.


# 최소한의 폭력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했는데 결국 그것이 상대방에게 상처가 되고 폭력이 된다면 이것은 너무나 슬픈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랑에 정해진 방법 같은 것은 없다. 오히려 어떤 정해진 방법이 더 큰 폭력을 가져 올수도 있기 때문에 방법을 찾으려는 태도는 금물이다. 다만 이러한 인간의 인지적 메커니즘이 작동한다는 것을 알고, 끊임없이 이를 성찰하고 반성하는 태도는 필요할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원하고 좋아하는 것을 상대방도 반드시 좋아할 것이라는 위험한 태도에서 벗어나 상대방을 민감하게 읽으려는 노력을 동반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한다고 할지라도 상대방은 나와 다른 타자이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내가 상처를 입히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를 인식하고 민감하게 타자를 읽으려고 하는 사람은 결과적으로 상대방에게 최소한의 폭력을 행하게 될 것이다. 사랑이 폭력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때, 폭력은 불가피하다. 문제는 그것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고, 이는 끊임없는 소통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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