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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한현재 Apr 01. 2018

'사랑'의 주어 역설

'사랑'은 매번 증명해 내 보이는 것.

  


  비트겐슈타인이라는 현대의 언어철학자는 언어 사용의 남용과 오용 때문에 모든 철학적 문제가 생겨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 정말하게 언어를 분석해 철학뿐만 아니라 사람들 간의 일상 대화에서도 생길 수 있는 언어적, 일상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내 인생의 영원한 화두이자 인간의 행복에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랑’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의 태도로 접근해 보면 그 실체가 조금 분명해 질까?


  ‘사랑, 정의, 용기’와 같은 추상명사들은 우리에게 이러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사랑, 정의, 용기’가 우리 세계에 실체로 미리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이 세상에 정말 ‘사랑’이라는 것이 실체로 분명하게 존재하고 우리는 그 개념에 따라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일까. 비트겐슈타인이라면 단호하게 아니라고 이야기했을 것이고, 우리들의 이러한 착각 때문에 우리들의 사랑에 문제가 발생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사랑, 정의, 용기’와 같은 추상명사는 그것에 대응하는 실체가 미리 우리 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개념들은 우리가 어떤 행위를 했을 때 비트겐슈타인의 말마따나 ‘드러나고, 보여 지는 것’일 뿐이다. 즉, 우리 안에 ‘용기’라는 것이 있어서가 짝사랑하는 상대에게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고백을 했을 때 우리는 ‘용기’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만약 우리 안에 ‘용기’라는 것이 미리 존재한다면, 다음 고백 또한 순조롭게 이어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알지 않는가? 저번에는 용기 있게 고백을 했지만, 이번에는 너무 떨려서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럼 이 사람은 용기가 있는 사람인가 없는 사람인가? 우리는 그렇게 둘 중 하나로 결론내릴 수 없고, 그저 저번에는 용기를 보였고 지금은 용기를 보이지 못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용기라는 추상명사는 마치 우리에게 이렇게 요구하는 것 같다. 용기를 증명해 내 보이라고. 그것도 매 상황에, 매번 말이다.


  사랑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로 미리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매번 증명해 보여야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이라는 것을 감정으로 이해하고, 그것이 내 안에 실체로 존재한다고 착각한다. 그러한 착각이 두 사람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하고 더 깊은 관계로 이끌어간다면, 그게 착각이든 아니든 밀고 나가도 좋겠지만, 이러한 착각은 필연적으로 관계에 문제를 발생시킨다. 내 안에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있다고 결론을 내려버리는 순간, 우리는 갑자기 자세를 고쳐, 상대방의 사랑을 확인하고 시험하려고 하는 평가자가 되어버린다. 나의 사랑은 내 마음에 확고하게 있으니, 중요한 것은 이제 상대방의 사랑이고 그것을 확인하는 데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때부터 비극은 발생한다. 왜냐하면 사랑이라는 것은 반드시 ‘나’를 주어로만 사용할 수 있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말은 ‘나’를 주어로만 쓸 수 있는 말이라서 상대방을 주어로 쓰는 순간 어떤 모순이 발생해버린다. 사랑은 앞에서 말했듯이 내가 행동으로 증명해 내 보여야하는 것이다. ‘고통’과 관련지어 사랑을 이해해 볼 때, 사랑은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고통을 감내해 내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사실 배가 고프지만 배가 부른척하며 상대방에게 음식을 건네는 것이고, 나도 사실 춥지만 강한 척 해 보이며 떨고 있는 상대방에게 내 자켓을 건네는 것이다. 사랑은 고통을 주는 게 아니라 받는 것이니까. 이처럼 나는 어떤 고통을 감내하는 행동을 통해 상대방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고 증명해 낼 수 있다. 어쩌면 상대방도 나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사랑을 확인할지도 모르겠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을 뿐만 아니라 너무나 예쁘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왜냐하면 ‘사랑’이라는 단어를 ‘나’를 주어로 썼기 때문이다. 만약에 상대방을 주어로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면 어떻게 될까. 



  어느 날 내(A)가 사랑하는 연인(B)이 지독한 독감에 걸렸다. 이 독감은 전염성이 매우 강해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쉽게 전염된다. 그런데 너무 같이 있고 싶은 마음에 만났고, 만나서 얼굴을 보니 키스가 하고 싶어졌다. 물론 상대방도 같은 마음이었다. 이 때 각자의 입장에서 ‘사랑’을 증명해내는 모습은 이렇다. A는 B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B가 키스하기를 원했을 때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독감이 전염된다 하더라도 기꺼이 감당을 할 것이다. 그렇게 아픈 모습으로 쳐다보는데 어찌 그것을 거부해서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 있을까. 차라리 자신이 그 고통을 감당 하는 게 낫지. B는 상대방과 너무 같이 있고 싶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 때문에 독감에 걸리게 둘 수는 없다. 내 몸처럼 생각하는 상대방이 지금 내가 겪는 이 고통을 겪게 된다면 나 또한 그 이상의 고통을 겪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B는 정말 같이 있고 싶고, 키스를 하고 싶지만 그를 사랑하기에 그 마음을 꾹 눌러 참으려고 할 것이다. 이 두 사람은 그 사이에서 서로 실랑이를 벌이며 있을 것이다. A는 기꺼이 B를 안고 있으려 할 것이고, B는 A를 돌려보내려고 할 것이다. 이 두 사람의 경우 정말 제대로 ‘사랑’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A, B는 철저하게 자신의 입장에서 고통을 감수하려고 했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위대한 사랑이었다. 그런데 만약 ‘사랑’이라는 단어의 주어를 상대방으로 놓으면 어떻게 될까. B는 상대방이 자신을 사랑한다면 기꺼이 자신이 독감이 걸리더라도 나에게 키스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요구한다. 이 때 물론 A가 독감을 감수하고 키스를 하는 것은 분명 ‘사랑’을 증명하는 행위가 맞지만, B가 그것을 A에게 요구하고, 그의 사랑을 확인하려고 하는 순간 묘한 역설이 발생한다. 그러는 순간 B는 A를 사랑하지 않게 돼 버리는 것이다. 자신의 욕망(키스, A가 자신을 사랑하는지에 대한 확인)을 위해 상대방에게 고통(독감)을 전가하고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A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A는 이렇게 생각한다. 자신이 독감에 걸렸더라면 B를 위해서 만나고 싶고 안고 싶어도 그것을 고통스럽게 참을 것이라고. 그래서 B가 자신에게 오늘 만나서 같이 있자고 했을 때, B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상대방의 사랑을 의심하고 확인하려고 할 것이다. “내가 독감에 걸렸다면, 너를 만나고 싶다하더라도 꾹 참았을 거야. 네가 독감에 전염되면 너에게 내 고통을 주는 것이니까, 그건 사랑이 아니잖아. 그런데 넌 왜 그렇지 않아?” 이 경우도 마찬가지로, B가 보고 싶은 마음을 꾹 참는 게 그녀의 사랑을 증명해 보이는 방식이 맞지만, 이 말을 A가 하는 순간 또 역설이 발생한다. A는 그 순간 B를 사랑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고통(보고 싶지만 참아야하는)을 주고, 내 고통(독감에 걸리는 것)을 줄이려는 행동이니까 말이다.  


  이래서 참 사랑이라는 게 어려운 것 같다. 오직 ‘나’만을 주어로 해야 하고, 상대방에게 그 어떤 것도 요구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는 상대방의 사랑을 확인하려고 어떤 행동을 요구하는 순간 나는 반대로 그를 사랑하지 않게 돼 버리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는 것이겠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것을 우리 안에 존재하는 실체로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사랑은 매번, 매 행위에서 증명해 보여야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상대방에게만 그것을 보이라고 요구하게 되기 때문이다. 대개 이러한 생각과 자세를 가진 사람은 겉에서 볼 때 그 어떤 사랑도 ‘드러내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사랑은 이미 자신의 마음속에 확고하다고 착각하고 있으니 행동을 할 리가 있나. 계속 상대방의 사랑만 갈구하다가 이별을 통보받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말을 듣게 될지도 모르겠다. “난 한 번도 너의 사랑을 느껴본 적이 없는 것 같아. 너에게 그런 사랑을 요구할 순 없었지만, 그렇게 지속되어 오면서 내 스스로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어, 그래서 더 이상 못하겠어.” 


  어쩌면 그 사람은 정말 당신을 진심으로 아껴주고 사랑해준 유일한 사람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당신은 그에게서 계속 확인하려고만 했고, 자신의 사랑을 보이는데 소홀했다. 그렇게 떠나보낸 연인은 한명으로 족하다. 이제부터라도 매번 증명해 드러내 보이자. 왜냐하면 사랑은 ‘보여 지는 것’이지 절대 내 안에 있는 게 아니니까. 


사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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