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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한현재 Oct 09. 2017

잊고 싶지만 잊고 싶지 않은 그것

영화, '비포선셋'

   아이에게 심부름을 시킨 부모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얘가 가다가 딴 곳에 정신이 팔려 길을 잃지는 않을까 조마조마 한다. 과연 사와야 할 물건을 아이는 기억이나 할 수 있을까. 가끔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아이가 보는 세상은 어떨까. 어른이 된 내가 보는 세상과 아이들의 세상은 어떻게 다를까. 아이들에겐 따로 놀이터가 필요하지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이 세상 자체가 이미 아이들에게 놀랍고 흥미로운 놀이터일 테니까. 아이 입장에서는 어쩌면 세상이 자꾸 자신을 유혹하는 것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이 자꾸 길을 잃고, 심부름을 제대로 못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아이들은 어른들과 달리 세계에 무한히 열려있어, 세상에 몰입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영혼은 너무나 자유로워서 자신의 몸 속에 붙박혀 있기보다 끊임없이 다른 사물로 건너가려고 한다. 그렇게 건너가 버린 영혼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등짝 스매싱이 날라 오고, 그제서야 집나간 영혼은 제 몸으로 돌아오게 된다.


   언제부터 우리는 세상을 궁금해 하지 않게 되었을까. 언제부터 우리는 세상에 놀라워하지 않게 되었을까. 슬프지만 ‘어른이 된다.’라는 건 이렇게 더 이상 세상에 몰입하지 못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근무하는 국어교사다. 점심시간이면 나는 항상 체육관으로 가 농구를 하는 아이들과 함께 논다. 물론 나는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경기에 참여하지는 않고 심판을 본다. 점심시간이 되면 항상 체육관으로 달려오는 이 아이들을 보면 10년 전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나 또한 점심시간은 물론이고 야자시간에도 몰래 빠져나와 강당으로 달려갔었고, 그것도 모자라 야자가 끝나고 새벽 2-3시까지 친구들과 농구를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행복했던 시절인데, 그때는 그것이 행복인지도 모르고 그냥 자석에 끌리듯이 몸을 맡겼었다. 어른이 된 지금, 나는 물론 농구 동아리에 들어가 체육관을 대관하고, 주기적으로 다른 팀과 경기를 한다. 하지만 그 때만큼 농구에 몰두하지 않는다. 정해진 대관 시간 동안(2시간), 다음 날 근무에 지장이 가지 않을 만큼의 에너지만 사용하여 농구를 한다. 어쩐지 씁쓸한 기분이 든다. 난 언제부터 농구를 이렇게 ‘적당히’ 하게 된 걸까...... 이렇게 몸을 사리며 농구를 하는 나와 달리, 30분 뒤에 바로 수업을 들어야하는 이 아이들은 그런 건 하나도 신경 안 쓰인다는 듯이 온몸을 던져 농구를 한다. 땀이 뻘뻘 나고 졸음이 쏟아지는 것은 그 다음 일이다. 지금 이 아이들에게 중요한건 내 앞의 상대이고, 상대와 대결하는 그 순간이다. 점심시간이 끝나기 5분 전, 뭔가에 홀린 듯이 농구를 하는 이 자식(?)들을 데리고 나는 교실로 올라간다. 마치 개구리에 푹 빠진 아이를 이제 그만 가자고 질질 끌고 가는 엄마처럼. 이 녀석들은 자신들의 모든 에너지를 체육관에서 쓰고 교실로 와 숙면을 취한다. 물론 내 시간이다. 이 녀석들은 내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곤히 잠에 빠져드는데, 나는 그런 모습이 미우면서도 부러웠다. 그래서 농구를 ‘적당히’ 하라고 말하려고도 해보고, 자고 있으면 깨워서 공부시키려고도 해봤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절을 내가 행복으로 그리고 있는 만큼, 그들에게도 그것은 행복일 것이다. 너무나 소중한. 그리고 그 행복을 빼앗을 권리 같은 건 내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제 나는 그 녀석들을 애써 깨우지는 않는다. 농구를 적당히 하라고 하지도 않는다. 그저 나는 이 녀석들의 그런 열정이 오래가기를, 나처럼 되지 않기를 속으로 바랄 뿐이다. 그걸 깨버리는 건 선생님으로서, 한 어른으로서 할 짓이 못 되니까.

   

  어렸을 땐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더 이상 실패하고 싶지 않았고,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세상을 좀 더 잘 이해하고, 내 상황을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어른이 된 지금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아이가 되고 싶어 한다. 어른으로 산다는 건 뭐랄까 세상에 거리를 두는 느낌이다. 그래서 고독하다. 세상을 더 이상 만지려고 하지 않는다. 만진다는 건 곧 상처 각오해야함을 의미하니까. 아이들은 촛불을 자꾸 만지려고 한다. 너무 예쁘니까. 하지만 어른인 우리들은 촛불을 만지는 것과 같은 미련한 행동은 하지 않는다. 데일게 뻔하니까. 하지만 우리도 한 번은 만지지 않았을까. 아마 만졌을 것이고, 손이 데였을 것이다. 그 후로 우리는 더 이상 촛불을 만지지 않게 되고, 그렇게 촛불은 우리에게 ‘배경’이 된다. 이러한 삶을 ‘기 드보르’라는 사람은 ‘관조하는 삶’이라고 말한다. 무서운 건 이 철학자는 그런 삶은 살아도 산 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관조되는 대상 - 이 대상은 그의 무의식적인 활동의 산물이다 - 에 대한 구경꾼의 소외와 복종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가 더 많이 관조하면 할 수록 그는 더 적게 살아가게 된다."
                                                                                                                       - 기 드보르, '스펙터클의 사회' 


   이 철학자의 말을 받아들이게 되면, 우리는 놀라운 결론에 이르게 된다. ‘난 28년을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나의 착각이고, 실제로는 10년 정도 밖에 살지 못한 것이구나. 그리고 따지고 보면 그 10년도 유년시절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니, 최근 몇 년은 그냥 시체로 살아온 것이구나.’ 한 번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자. 최근 몇 년 동안 무언가에 빠져 열렬히 삶을 살아낸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그저 구경꾼처럼 세상을 바라보지는 않았는지. 슬프게도 우린 대부분의 삶을 구경꾼으로 살아간다. 인생이라는 연극의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 세계를 그저 한 발자국 뒤에서 바라만 보는 삶. 그리고 그들을 부러워하는 삶. 그래서 그런지 구경꾼의 삶은 뭔가 쓸쓸하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영화 ‘비포선셋’은 어른이 되어버린 두 남녀의 씁쓸한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다. 전편인 ‘비포선라이즈’의 낭만적, 열정적 분위기와는 다르게, 이 영화는 뭔가 쓸쓸하고 씁쓸하다. 열렬히 하룻밤의 꿈같은 사랑을 했던 두 사람은 6개월 뒤에 만나자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제리는 그 날 플랫폼에 나와 기다렸지만, 셀린느는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두 사람의 대화에서 나오지만, 할머니의 장례식 때문에 셀린느는 가지 못했다) 그렇게 9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우연히 둘은 파리에서 만나게 된다. 유명 작가가 되어 벌써 아이까지 둔 제리는 자신의 책 홍보 행사 중 우연히 셀린느를 보게 되고, 둘은 9년 동안 서로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전편 ‘비포선라이즈’도 마찬가지지만 ‘비포선셋’이라는 영화는 거의 두 사람의 대화만으로 구성 되어있다. 출연하는 배우는 실질적으로 거의 4명 정도밖에 안 된다. 대부분은 제리가 공항으로 가는 동안에 하는 둘의 대화로 채워진다. 별다른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영화의 모든 장면들이 두 사람의 대화를 부각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듯하다. 놀라운 건 그런데도 관객들에게 엄청난 몰입감을 준다는 것이다. 9년이라는 시간 동안 두 사람은 어떻게 변했을까.

   너무나 강렬하고 낭만적이었던 사랑 때문이었을까. 두사람의 삶은 굉장히 망가져있었다. 누가 봐도 행복 할 것만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제리는 자신을 불행하다고 말한다. 제리는 그 날 이후 셀린느를 잊지 못했다. 그래서 작가가 되었다. 그녀와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 유명해지면, 셀린느가 혹시나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에. 제리는 그것을 농담처럼 얘기했지만, 내 생각에는 진짜 그게 가장 큰 목적이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둘의 그런 강렬한 사랑 후 제리는 그렇게 ‘과거’에 살기 시작한다. 한 여인과 결혼하고 아이까지 있지만, 여전히 그의 마음속에는 셀린뿐이었다. 그렇게 웃음 없는 집안에서 사랑 없는 결혼 생활을 유지하느라 지칠 대로 지친 제리는 셀린을 보자마자 활력을 되찾는다.


"난 1년 내내 불행해. 아들과 있을 때만 행복해. 아내와 난 필이 안 맞아. 헤어지고 싶지만 아들 땜에 참지. 하지만 우리 집엔 웃음이 없어"

"다 늙은 황혼에 이혼하긴 싫어. 너무나 비참하지. 난 행복해지고 싶어 내 아내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우린 의무감에 살고 있어. 세상의 도덕적 기준에 맞춰서."

"난 늘 꿈을 꿔. 어떤 꿈이냐 하면. 나는 플렛폼에 서 있고, 자긴 기차 타고 내 곁을 스쳐가. 스쳐가고 또 스쳐가지. 또 다른 꿈을 꿔. 임신한 자기가 내 옆에 누워있지. 내가 만질려고하면 자긴 날 거절해. 그렇게 울다가 깨면 아내가 보고 있어 낯선 타인처럼"


   그렇다면 셀린느는 어떨까. 겉으로 보기에 그녀도 행복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 결혼은 안했지만 사귀는 남자도 있고, 자신의 신념과 꿈을 실현하기 위해 환경단체에서 커리어를 쌓는 그녀. 누군가가 보기에는 굉장히 멋지고 부러운 삶을 사는 셀린느는 제리와 마찬가지로 자신은 죽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제리와 하룻밤의 사랑 이후, 그녀는 몇 번 더 연애를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때마다 셀린은 상처를 받았고, 그런 반복에 지친 그녀는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게 돼버린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제 상처받는 것이 두려운 그녀는 더 이상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어볼 노력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


"사랑은 힘들어, 몇 번 상처받으면 환상이 깨지지, 그럼 포기하고 현실을 인정하게 돼. 아니 사실 제대로 된 사랑을 해본적도 없어"

"자기 책을 읽고 혼란이 왔어. 전엔 내가 얼마나 낭만과 꿈이 많았는지 깨닫게 됐거든. 그런데 지금 난 사랑을 못믿게 됐어. 그날 밤 내 모든걸 쏟아 부어서 아무것도 남은게 없어. 자기가 내 모든걸 다 가져가 버린 것 같애. 내 심장은 식었어. 내겐 현실과 사랑이 공존 못해."

"인연이 뭐야? 그런게 어딨어 짝을 만나지 못하면 반쪽짜리 인생인거야? 상처받는 데에 지쳤어. 그래서 이제 애초에 노력 안해. 소용없으니까"

"난 여자로서 실패했어. 초연한 척 하지만 속으론 죽어간다구. 감각없는 무생물처럼 변하고 있어."


   얘기하다가 스스로에게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차에서 내리려고 하는 셀린느를 보면서 굉장히 슬펐다. 지금 자신의 삶이 너무나 싫고, 그런 자신을 부정하고 싶지만 그래버리면 와르르 무너져 버릴까봐 간신히 자신을 지켜내고 있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보였다. 생생하게 다 기억하면서 그 날의 섹스가 기억이 안 난다고 말하는 셀린느의 모습에서, 얼마나 셀린느가 지금 위태로운 상태인지 느낄 수 있었다.


   이들은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어쩌면 그때의 사랑이 너무나 강렬했기에, 이렇게 되어버린 게 아닐까. 셀린느의 말마따나 그 날 밤 모든 것을 쏟아 부어서 서로에게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어버린 것일까. 헤어지면서 둘은 어쩌면 직감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그 누구를 만나더라도 그 사람만큼 사랑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그래서 그 이후 자신들의 삶이 마치 필요 없는 부스러기처럼 느껴지는 게 아닐까.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이 영화는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니까 너무 많이 사랑하지 말라고. 모든 걸 쏟아 붓지 말라고. 그럼 당신 인생은 이 둘처럼 망가질 거라고, 평생 이들처럼 과거의 악령에 사로잡혀 살게 될 거라고.


   이 영화의 경고는 정말 섬뜩할 정도로 무서웠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들이 부러웠다. 망가져 버린 그들의 인생은 반대로 생각해보면, 인생 전체가 망가져 버릴 만큼의 강렬한 사랑을 했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돌이켜보면 그렇다. 때때로 너무나 깊은 사랑은 감당하지 못 할 만큼 많은 것을 남기고, 그걸 우린 수습해야만 한다. 어쩌면 그 과정이 너무나 힘들기 때문에 사랑에 빠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이렇게 묻는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열정에 사로잡혀 앞뒤 안 가리고 상대방을 원하고 상대방에게 몰입했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기꺼이 돌아가겠느냐고. 세상에 대해 많이 알게 되고, 사랑에 대한 환상이 사라진 지금의 삶보다 그때가 더 행복하진 않았느냐고. 모르겠다.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가겠지만, 결국 똑같이 반복되지 않을까. 우린 또 상처를 받을 것이고, 또 다시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사랑을 적당히 하는 법을 배울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많이 흐르면, 어느 새 사랑이라는 걸 믿지 않는 사람이 되어있을 것이다. 슬프게도. 

 

  그럼 정말 희망은 없는 것일까. 계속 그냥 과거의 추억 속에서, 그것을 그리워하며 살아야 하는 것인가. 어른이 되어서도 그런 사랑을 할 수는 없는 것일까. 물론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다. 사랑 없는 결혼이나 그런 관계 속에서 그냥 저냥 살아가고 싶지는 않다. 차라리 계속 상처받더라도 그 믿음만큼은 끝까지 가져가고 싶다. 그게 어떤 모습일지는 아직 그려지지 않지만, 해봐야지 뭘. 사실 선택의 여지는 없다. 구경꾼처럼 살아가는 삶은 살아있어도 죽은 것이니까. 그렇게 오늘도 살아있기 위해서 우리는 상처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쫄지 말자. 씨바


왈츠 한곡 들어봐요
그냥 문득 떠오른 노래
왈츠 한곡 들어봐요
하룻밤 사랑의 노래
그날 그댄 나만의 남자였죠
꿈같은 사랑을 내게 줬죠
하지만 이제
그댄 멀리 떠나갔네
아득한 그대만의 섬으로
그대에겐 하룻밤 추억이겠죠
하지만 내겐
소중한 당신
남들이 뭐라든
그날의 사랑은 내 전부랍니다.
다시 한번 돌아가고 싶어
그날 밤의 연인이 되고 싶어
어리석은 꿈일지라도
내겐 너무 소중한 당신
그런 사랑 처음이었죠
단 하룻밤의 사랑, 나의 제시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어
난 언제나 행복해요
그날의 영원한 추억 때문에
다른 사람 품에 안겨있어도
죽는 날까지 내 맘엔 그대 뿐
왈츠 한곡 들어봐요
우울한 마음에 떠오른 노래
왈츠 한곡 들어봐요
하룻밤 사랑에 관한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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