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더치페이)
‘하늘아래 같은 색조는 없다’ 이것은 색조화장을 즐겨하는 여성들에게 진리처럼 여겨지는 명제다. 물론 이것은 여성이 아니더라도 여자 친구를 따라 화장품가게를 가본 남성이라면 어느 정도 느꼈을 법한 것이다. 남성인 나의 시각에서 봤을 때, 화장품가게에 진열되어있는 립스틱들은 마치 실험실에 진열되어있는 실험체들 같았다. 이 실험체들은 이름이 없다. 그들은 숫자로 호명되며, 하루 종일 인간에 의해 시험 당한다. 결코 남성의 눈에는 구분되지 않는 그들은 끊임없이 입술에 얹혀 옆 숫자의 실험체와 구별되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그렇게 자신의 고유성을 입증한 실험체는 이제 실험실에서 나올 수 있게 된다. 남성은 이해하지 못한다. 121번과 122번의 차이를. 남성의 눈에는 100번부터 150번까지의 실험체들이 빨강, 분홍, 주황 이 세 가지로 구분된다. 100번과 130번의 차이는 인지하지만, 121번과 122번의 차이는 알 도리가 없다. 그러나 여성은 고도의 집중력과 민감함을 발휘하여 그 둘의 미묘한 차이를 밝혀내고, 자신에게 더 맞는 색을 골라낸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앞의 이야기는 조금 과장이 섞여있긴 하지만, 이것은 우리 언어가 갖는 한계를 잘 보여준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를 언어로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 이것만큼 큰 착각은 없다. 언어는 명백한 한계를 가지고 있고, 우리는 그 한계 안에서만 사고하고, 세상을 인식할 수 있다. 위의 남자는 빨간색, 분홍색, 주황색이라는 언어만 가지고 있었기에, 50개의 색을 3가지로밖에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물론 눈으로는 121번과 122번의 차이를 감지할 수 있었겠지만, 그는 그것을 명확히 구분해줄 언어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반면 여자는 남자보다 색깔과 관련해서 더 세분화된 언어를 가지고 있다. 분홍도 다 같은 분홍이 아니다. 이건 ‘코랄 핑크’고, 그건 ‘데어링 핑크’, 저건 ‘핫핑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자들이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색을 구별하는 언어를 가졌을까. 그건 아니다. 상대적으로 남성보다는 많은 언어를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여자도 모든 색을 구별하는 언어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회사마다 자신들의 립스틱 색깔에 독특하고 새로운 이름을 붙여 판다. ‘최애쁨템, 외모성수기’ 등등. 그렇게 제품 이름이 또 하나의 색깔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만 한다.
-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논고』
이러한 언어의 한계를 명확히 구분 지으려고 했던 철학자가 한 명 있다. 책 한 권으로 철학을 끝냈다고 자부하는 이 위대한 철학자의 말을 들어보라. 비트겐슈타인은 이 세상에는 말할 수 있는 것이 있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 중 말할 수 있는 것들을 『논리철학논고』에 정리해 놓았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만 한다.’ 그렇게 철학을 끝내셨다. 응당 맞는 말인 것 같다. 가령 120번과 121번 사이에도 수백 수천가지의 스펙트럼이 있을 텐데, 그 미묘한 차이들을 다 언어로 어떻게 표현하랴. 또한 정의, 사랑, 평화, 용기와 같은 것은 물론 언어로 명명되어있지만, 그 뜻이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 사람마다 그 뜻이 다 다르다함은 그것의 실체는 절대 완전하게 언어로 변환될 수 없음을 의미하며, 결국 이러한 추상적 개념들은 결코 ‘말 할 수 없고, 행동을 통해 보여질 수 있을 뿐’이다.
말할 수 없는 영역의 것들 중에서도 가장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마 ‘사랑’일 것이다. 지구에 60억 인구가 있다면, 그 의미는 아마 60억 개가 될 것이다. 그만큼 모호하고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 이 ‘사랑’이라는 개념은 결코 언어로 변환될 수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사랑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내’가 하는 것이고, ‘나’ 밖에 알 수 없는 그런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가을방학의 노래 중에 ‘샛노랑과 샛빨강 사이’라는 곡이 있다. 이 노래의 주인공은 자신이 좋아하는 색이 분명 머릿속에 있는데, 그것을 설명할 언어가 없다. 그래서 막연하게 샛노랑과 샛빨강 사이 어딘가에 있다고 얘기하는데, 사실 언어의 한계를 고려해보았을 때 이것이 최선이라고 보여 진다. 만약 이 주인공이 상대방에게 자신의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그 색을 설명하기 위해 책 한권을 쓴다한들, 상대방이 정확하게 그 색을 포착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비슷하게는 떠올리겠지만, 완벽하게 일치할 수 는 없을 것이다. 그 사람 머릿속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또한 말로 설명은 못해도 본인은 알 수 있다. 이것이 정확하게 내가 머릿속에 떠올렸던 그 색인지 아닌지. 사랑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다. 각자 각자만이 머릿속에 가지고 있고, 알고 있는 그 ‘사랑’을 입 밖으로 꺼낸 순간 엄청난 ‘왜곡’과 ‘비일치’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또한 자신의 이 행위가 사랑인지 아닌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으며, 그 행위를 한 당사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사랑은 말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이니까.
좋아하는 색을 물어볼 때
난 대개 오렌지색이라고 말하지만
내 맘 속에서 살아있는
내 인생의 색깔은 제 몫의 명찰이 없어
때로는 朱黃 때로는 등자 열매 빛깔
때로는 이국적인 탠저린이라 하지만
샛노랑과 새빨강 사이 어딘가 있어
샛노랑과 새빨강 사이 어딘가 있어
- 가을방학, '샛노랑과 샛빨강 사이' 中에서
불교에 ‘보시’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 자신에게 소중한 그 무언가를 바치는 것을 말한다. ‘보시’는 명백하게 ‘사랑’의 행위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에게 나의 소중한 무언가를 기꺼이 내어주니까. 그런 의미해서 ‘자비’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두 명의 보시 행위를 하는 사람이 있다. 편의상 A와 B라고 해보자. 두 사람 모두 똑같이 옷을 ‘보시’했다. 제 3자인 우리가 보았을 때, A, B는 모두 자비와 사랑을 실천한 사람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들의 행위가 ‘보시’인지 아닌지 우린 알 수 없고, 그렇기에 ‘말할 수 없다’ A는 집이 가난하다. 그럼에도 A는 자신의 2벌밖에 없는 옷 중 한 벌을 ‘보시’한다.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위해 정말 아프게 소중한 자신의 옷을 바친다. 반면 B는 집에 옷이 너무 많아 처치 곤란 상태에 처해있다. 올 겨울이 오기 전에 옷장 정리를 한 번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던 중 부모님이 다니시던 절에 우연히 같이 가게 되었고, ‘보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그렇게 처치곤란이던 옷들을 ‘보시’했다. 자, 과연 A, B 중 누가 진정한 의미의 ‘보시’, 즉 ‘사랑’을 실천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다. 당연히 A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둘의 상황과 속마음을 안다고 전제 했을 때 말할 수 있는 것이지, 결코 실제 현실에서는 알 수 없는 것들이다. 그리고 B를 보고 ‘넌 그냥 쓰레기를 손쉽게 처리한 쓰레기야’라고 쉽게 얘기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가령 B가 원래 목적은 처치곤란인 옷들을 처리하는 것이었지만 ‘보시’의 의미를 알고 그 중에 자신이 정말 아끼는 옷을 하나 넣었다면? 그렇다면 B 또한 진정한 보시 행위를 했다고 볼 수 있는 것 아닐까. 즉, 이처럼 현실은 우리 생각보다 복잡하기 때문에 쉽게, 함부로 얘기할 수 없다.
사랑, 연애, 남녀관계와 관련해서 나오는 대부분의 논쟁들은 사랑의 이러한 결코 '말해질 수 없는' 측면을 무시했기 때문에 발생한다. 즉 연애를 하고 있는 본인들은 그들의 행위가 사랑인지 아닌지 각자 알 것이다. 위의 이야기를 빌리면, A는 스스로의 행위가 진정한 ‘보시’라는 것을 알 것이고, B는 옷을 내면서도 이건 진정한 ‘보시’가 아닌 거라는 걸 스스로 알 것이다.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다. 사랑을 하고 말고는 윤리적 문제는 아니니까. 문제는 그것을 알 수도, 말할 수도 없는 제3자가 그것에 대해 말할 때 발생한다. 대표적으로 이런 문제가 있다. 연인끼리 데이트 비용은 비율은 얼마정도가 적당한가? 혹은 더치페이, 데이트 통장 이런 것들이 연인관계에서 바람직한가? 등등. 이러한 문제는 사실 이렇게 말로 할 수 있는 문제의 것들은 아니다. 그럼에도 제3자의 관점에서 말을 하려고 하니까 자꾸 문제가 생기고 논란이 벌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대가를 바라고 주는 것을 ‘뇌물’이라고 하고, 대가 없이 그냥 상대방이 좋아서 주는 것을 ‘선물’이라고 한다. 사랑하는 관계는 ‘뇌물’이 아니라 ‘선물’을 주는 관계이다.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에게 밥을 사주는 이유는 그냥 그 사람이 좋아서다. 또한 그 사람의 짐을 들어주는 것도, 기꺼이 그 사람의 병간호를 해주는 것도 모두 그 사람이 좋아서 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밥을 사준 다음 혹은 선물을 사 준 다음, 그것에 비할만한 그 무언가를 바란다면, 혹은 그런 기대 속에서 사준 것이라면, 이것은 분명하게 ‘뇌물’이다. ‘나는 저번에 비싼거 해줬는데, 너는 겨우 이거야?’, ‘내가 이렇게 잘해주는데 너는 왜 나한테 해주는 게 없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증명 해 보이는 것이다. 내가 그동안 네게 해준 것들이 모두 다 ‘뇌물’이었다고. 이쯤 되면 사랑은 아니다. 정치와 경제의 영역이지. 밥 값, 커피 값, 영화 값 등의 데이트 비용도 마찬가지다. 그냥 상대방이 좋으면 상대방에서 ‘선물’하듯이 그냥 사주면 된다. 가장 좋은 관계는 서로 ‘선물’을 주는 관계이다. 나도 상대방이 그냥 좋으니까 사주는 거고, 상대방도 내게 그러는 거고. 그런데 이게 겉으로 보면 알 수가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선물을 주는 가운데 물질과 물질이 오고가는 것인지, ‘내가 이만큼 했으니, 너도 이만큼은 해야지’ 하는 기대 속에서 오고가는 것인지. 그러나 본인들은 알 것이다. 자신이 오늘 준 이것이 ‘선물’인지 ‘뇌물’인지. ‘사랑’인지 ‘거래’인지.
상대방에게 밥을 사주고 커피를 사주는 게 정말 ‘선물’ 즉, 사랑이었다면, 데이트비용의 적절한 비율이 몇 대 몇이니 하는 정치, 경제적인 이야기는 안 나올 것이다. 사랑은 그냥 주는 거니까. 스스로 거기에 그냥 정직하면 된다. 사랑하는 만큼 사주면 되는 거다. 비단 돈만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추울 때 겉옷을 벗어주는 것, 무거운 짐을 들어주는 것, 병간호를 해주는 것 모두 사랑 속에서, 선물처럼 이루어진 것들 아닌가? 왜 짐 들어 주는 것, 병간호는 어떤 계산도 하지 않고 기꺼이 하면서, 밥을 사줄 때, 영화표를 사줄 때에는 어떤 계산과 기대 속에서 사주는 것인가? 엄밀하게 따지면 짐꾼 서비스 부르고, 간호인 고용하는 것도 다 돈인데, 유독 데이트에 쓰이는 돈만 철저하게 그렇게 돈을 계산하고 따지느냐 말이다. 상대방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고, 내어주면 그게 다 선물이고 사랑인데. 우리가 진정으로 스스로에게 따져 물어야할 것은 돈의 액수가 아니다. 진짜 내 자신에게 물어야할 것은 ‘내가 진짜 상대방을 사랑하고 있는가.’, ‘내가 내 것을 기꺼이 상대방에게 내어주려고 하고 있는가.’, ‘나는 사랑에 정직하게 임하고 있는가.’이다.
사랑을 정치 공학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사랑은 희생이 아니다’라고들 한다. 그건 그냥 호구고, 바보 같은 거라고. 사실 이것도 말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우리는 사랑을 하게 되면, 더 힘든 걸 선택할 것이다. 나도 배가 고프지만 상대방에게 내 음식을 덜어 줄 것이고, 나도 춥지만 기꺼이 상대방에게 내 겉옷을 벗어줄 것이고, 피곤하지만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옆에서 병간호를 할 것이다. 희생이라고 생각할까. 아니, 어쩌면 줄 수 있어서, 옆에 있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진짜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만약 남자친구로서의 의무로 그런 것들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혹은 여자 친구에게 무언가를 바라기 때문에 그런 거라면, 자신의 행동을 ‘희생’이라고 말할 것이다. 상대방보다, ‘내가 널 위해 이만큼 희생 했어’가 더 중요한 사람 일 테니까. 물론 이것도 겉에서 제 3자가 봤을 때는 모르는 것이다. 본인들은 알 것이다. 자신들의 행위가 사랑인지, 의무 혹은 뇌물인지. 윤리적으로 그런 것들을 비판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사실 정확하게 말해서, 그런걸 따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불쌍하다. 사랑을 못하고 있다는 증거니까. 다만 내가 정말 싫은 건, 사랑에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 그러한 태도다. 그러니 제발 정직하자. 사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