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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한현재 Oct 05. 2017

이별 연습


남자 


내게 사랑은 상대방의 짐을 들어주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일까. 내 지난 사랑들은 모두 짐스러웠다. 상대방은 끊임없이 자신의 짐을 내게 보였고, 나는 그것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내게 짐을 던져버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게 선택권은 없었다. 내겐 그 짐을 들어주는 게 내 사랑을 증명할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여자 


내게 사랑은 포근함이다. 내가 상대방을 얼마만큼 믿을 수 있게 되었는가, 얼마만큼 내 솔직한 모습을 상대방에게 비추는가. 이것이 내 사랑을 재는 척도였다. 그래서 항상 조심스러웠다. 사랑이 무서웠고, 사람이 무서웠다. 상대방에 대한 믿음은 곧 내 자신이 상처받기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나 같은 것이니까. 그래서 나는 때때로 그게 너무나 두려워 그를 만나면서도 사랑하지 않았다. 나를 위해서. 


남자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은 모두가 다 나를 믿었고, 믿는 만큼 의지했다. 상대방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며 내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조용히 그녀가 들고 있는 짐을 들어주는 것, 그 사람만큼은 아니겠지만, 최대한 그 사람처럼 아파보려고 노력하는 것. 그러면서 생각했다. ‘이 사람이 나를 사랑하니까 내게 이렇게 기대는 것이겠지’ 사실 이렇게 생각해야 마음이 편했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종종 씁쓸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니, 혹시 그녀는 내가 아니라도 이렇게 의지할 그 누군가가 필요한건 아니었을까. 단지 나는 그녀가 그 누군가가 필요한 시기에 운 좋게 나타난 남자1은 아니었을까’ 


여자 


상대방을 점점 좋아하게 되자, 욕심이 생겼다. 가족, 친구들에게도 말 못했던 내 과거의 상처들 그리고 나의 진솔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것까지 모조리 다 사랑받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하나 둘 씩 나라는 사람의 인생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계속 얘기해 주었다. 그렇게 하나 둘 씩 나의 모습을 보일 때마다 상대방은 기꺼이 날 이해해주고 사랑해 주었다. 그리고 이런 내 모습을 받아들이고 내게 맞춰주었다. 너무나 고마웠고 나는 점점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남자 


조금 이상했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상대방에게 짐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짐을 드는 것인데, 그녀는 자꾸 내게 짐을 지우는 것만 같았고, 내 짐은 보일 틈도 지울수도 없었다. 힘들다고 하는 상대에게 ‘내 짐도 무거워’라고 하는 건 적어도 내겐 사랑은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나는 계속 상대방의 짐을 들어주었다. ‘그래, 그래도 내가 그녀보다 힘이 더 있으니까 당연히 그래야지’ 나는 열정의 도움을 받아 한동안 그녀의 짐을 훌륭하게 들어주는데 성공했다. 


여자 


사실 무언가를 요구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상대방이 내 모습을 알아주길 바랐고, 사랑받길 원했다. 상대방은 고맙게도 나를 받아들여 주었고, 사랑해주었다. 그리고 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지켜주려고까지 했다. 분명 나와 다른 그에게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기꺼이 나를 위해 그렇게 해주었다. 난 이제 그를 사랑할 준비가 되었다. 


남자 


오늘도 그녀는 내게 짐을 건넨다. 오늘도 여느 때처럼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건 고통스러우면서도 행복하다. 그 사람의 고통과 감정이 온전히 내게 전해지는 느낌이다. 하지만 한결 편안해진 그녀의 표정은 나를 즐겁게 한다. 그렇게 나는 또 버텨보기로 한다. 아직 나는 그녀가 좋으니까. 


여자 


돌이켜 생각해보니 항상 내 얘기만 한 것 같다. 한편으로는 좀 미안해진다. 내 것만 알아달라고 한 것 같아서 말이다. 오늘은 그의 이야기를 좀 들어줄까. ‘그래, 그래야겠다’ 그를 만났다. 그러나 그를 만나자마자 나는 편안함을 느꼈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줘야겠다는 결심은 까맣게 잊고 난 또 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깨닫는다. 그리고 다음에는 꼭 먼저 물어봐주어야겠다고 다짐한다. 


남자 


항상 우리의 사랑을 도왔던 열정이 잠시 자리를 비웠다. 일상과 삶의 무게에 지쳐 휴식을 취하고 있나보다. 오늘도 그녀를 만나러 간다.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움을 느낀다. 오늘은 내 짐도 많다고 느껴지는 날이니까. 역시나 그녀는 또 내게 짐을 지운다. 오늘은 그게 조금 버겁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걸 얘기할 순 없었다. 내가 여기서 ‘그동안 정말 힘들었어’라고 말하는 건 내겐 이별통보나 마찬가지로 여겨졌으니까. 그렇게 또 버텨보기로 한다. 


여자의 실수 


오늘은 꼭 그의 이야기를 들어줄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래줬던 것처럼, 그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이해하고 사랑해줄 것이다. 우리는 보통 때처럼 만나 또 이야기를 한다. 그러던 중 그는 내게 이별을 고했다. 왜? 난 이제 그를 사랑할 준비가 되었는데, 어째서 그는 나를 떠나려고 하는 걸까. 아, 그랬구나. 그동안 힘들었구나. 그동안 정말 고마웠는데, 제대로 고맙다는 말도 못했네. 원망스럽다. 왜 그는 그동안 내 얘기를 들어주기만 하고 자신의 얘기는 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래놓고 이제 와서 힘들다고 헤어지자고 하는 것일까. 아, 안 한게 아니라 하지 못 했던 거구나. 미안한 마음이 든다. 


남자의 착각 


그녀에게 이별을 고했다. 더 이상은 내가 못 견딜 것 같았다. 그녀는 내 이별통보를 듣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만도 할 것이다. 그녀입장에서는 갑작스러운 일이겠지. 하지만 내게는 이미 오래전부터 생각해온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사랑에 대한 나의 열정은 식어갔고, 식어간 만큼 나는 더 힘들어졌다. 하지만 그녀를 사랑하기에 버텨보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몇 달, 나는 결국 이별을 결심한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이 사랑의 끝은 내가 자초한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상대방은 내게 짐을 들어달라고 한 적이 없다. 다만 그녀는 자신의 짐이 그냥 무겁다고 얘기한 것이었고, 그것을 알아주기만을 바랐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저 자신이 이상한 사람이라서 힘든 게 아니라, 이 정도면 힘든 거라는 걸 내게서 인정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저 그것을 이해하고 인정하려고 하기보다, 들어주려고만 했구나. 상대방 입장에서는 얼마나 황당할까. 들어달라고 한 적도 없는 짐을 스스로 들어주다가 제풀에 못 이겨 이제 그만두겠다니.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 하지만 계속 이 관계를 이어갈 순 없을 것 같다.  


 

  나는 남자다. 그리고 나의 지나간 사랑들은 이렇게 끝이 났다. 성찰하지 않은 사랑은 똑같이 반복된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고, 다만 경험이 부족한 것이라고 생각해 더 많이 사랑을 하려고만 했었다. 하지만 경험의 양보다 중요한 것은 지나간 사랑에 대한 반성이라는 걸 이제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연습한다. 이별을. 또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 계속 곱씹는다. 적어도 같은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지는 말아야지. 그건 너무 아픈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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