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응답하라 1988'
추운 겨울이 오면, 우리는 자신의 여자 친구에게 겉옷을 벗어주는 남자들의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들은 추위에 떨고 있는 자신의 여자 친구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겉옷을 벗어준다. 마치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이 견디기 힘들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연인들 사이에서는 매우 자연스러워 보이는 이 풍경은 사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들의 행동은 인간의 본능을 거스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추울수록 더 옷을 껴입어 자신의 체온을 유지하려고 한다. 이것은 동물이라면 가지고 있는 하나의 본능 같은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지금 자신의 체온을 더 떨어뜨리는 행위를 하고 있다. 그것도 자발적으로 말이다. 세상에 본능을 이기는 것이 많이 없다는 것을 생각해봤을 때, 이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커플들의 이러한 기이한 행동들은 같이 밥을 먹을 때 또는 병구완을 해줄 때에도 나타난다. 자신의 음식을 상대방에게 선뜻 내어주는 것이나, 아픈 상대방을 위해서 기꺼이 밤새 병구완을 해주는 모습들은 앞에서 겉옷을 벗어주는 행동과 같이 모두 본능을 거스르는 것들이다. 자신의 식욕과 수면욕을 억누르면서까지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모두 그 답을 알고 있다. 바로 사랑이다. 어떤 사람이 평소에 먹을 것을 무지 밝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음식을 기꺼이 양보한다. 자신의 식욕을 채우지 못하더라도, 상대방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잠깐이라도 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사랑은 이렇듯 스스로 가난해지는 것이다. 여기서 ‘가난’이라고 하는 것은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에너지와 같은 정신적인 것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즉, 자신의 어떤 물질적인 것을 상대방에게 주는 것 뿐 만아니라, 상대방의 짐을 들어주는 것이나 잠을 참으며 병구완을 해주는 행위 모두 스스로를 가난하게 만드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행위를 통해 나의 에너지가 소모 되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더 힘든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행동들이 모두 자발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인데, 사랑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누구도 그렇게 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대방은 괜찮다고 하는데, 스스로 자신을 힘들게 만든다. 이러한 설명되지 않는 우직함은 사람들에게 종종 감동을 주는데, 요즘 재미있게 보고 있는 ‘응답하라 1988’이라는 드라마에 이런 것들이 많이 보인다.
이 드라마는 쌍팔년도 쌍문동에 한 골목 다섯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크게 아이들의 이야기와 부모들의 이야기로 나누어 볼 수 있겠는데, 지금 여기에서 다루고자 하는 부분은 어른들의 이야기이다. 이들을 한 골목에서 서로 정말 어렵게 살아왔다. 아직도 반 지하에서 다섯 식구가 살고 있는 집도 있고, 어떤 집은 단칸방에서 살면서 심장병을 앓고 있는 자식을 두기도 했다. 이들은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서로서로 도우며 살아간다. 물론 복권에 당첨되어서 잘 살게 된 집도 있지만, 반 지하에 사는 집이나 과부로 혼자 아이들을 키워야하는 집들도 서로 서로 먹을 것을 나눠준다. 이 드라마에서 이것을 조금 코믹하게 표현했는데, 예를 들어 한 집에서 애들을 통해 샐러드를 보내면, 그 집에서는 받은 샐러드보다 더 많이 깍두기를 줘서 보낸다. 동시에 또 다른 집 아이가 카레를 가져오고, 그 아이에게 다시 깍두기를 줘서 보낸다. 이렇게 다섯 집에서 각각 김, 상추, 소고기, 샐러드, 깍두기를 나누는데, 그 결과로 한 집 식탁에 다섯 집의 음식이 같이 놓이게 된다. 처음에는 된장국 하나에다가 밥을 먹으려고 했는데 나중에는 진수성찬이 된 식탁의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다.
이들은 스스로 정말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것들을 내어 준다. 이들도 앞의 커플들처럼 스스로 더욱 가난해지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가. 스스로 더욱 가난해지는 쪽을 선택했지만 결과적으로 이들은 더욱 풍족해진다. 마치 자신의 겉옷을 벗어주어서 더 추워졌지만, 따뜻해하는 여자 친구를 보며 자신의 마음이 오히려 따뜻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어떤 대가를 바라고 자신의 음식을 나누어준 것일까? 이들은 그냥 먼저 자신의 것을 내어줬을 뿐이다. 이유는 그냥 주고 싶어서. 그것을 받은 상대방도 또 그냥 자신의 것을 덜어준다. 어떤 대가를 바라고 무언가를 주는 것을 가리켜 우리는 ‘뇌물’이라고 표현한다. 이들에게 이 ‘뇌물’이라는 단어를 쓸 수는 없을 것 같다. 결과적으로 서로 교환한 것이 된 것은 맞지만 처음부터 어떤 대가를 바라고 한 행동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냥 자신의 것을 주었고, 상대방도 그냥 자신의 것을 주었을 뿐이다. 사랑이 서로 교환되면 이렇게 서로 가난해지는 것으로 시작했어도 결국에는 풍족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때 청렴한 관리들에게 ‘청빈’이라는 말을 썼다. 자신의 배만 불리기 급급했던 돼지 같은 관리들과 달리 이들의 곳간은 항상 텅텅 비어있었다고 한다. 단순히 부정한 돈을 받지 않아서 청렴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이 정당하게 받은 녹봉마저 다 나눠준다. 지금의 청문회는 전자에 한해서만 이루어지는데도 이것마저 넘어가는 사람이 많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과연 우리나라에 진정한 지도자라고 불릴만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안타깝게도 지금보다 500년 전에 훌륭한 지도자들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이들은 단순히 물욕이 적은 사람들이 아니다. 그리고 어떤 정치적, 종교적 신념 때문에 사람들에게 나눠 준 것도 아니다. 그런 이유라면 단언컨대 오래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유일한 동력은 역시 사랑이다. 백성들을 그만큼 사랑하고, 백성들의 고통에 함께 아파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다스리는 백성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에 따뜻함을 느꼈던 것이다.
사랑과 가난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 가난해지는 것이 사랑이고, 반대로 가난해짐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증명해보일 수 있다. 자신들도 먹을 것이 부족하면서 자신의 음식을 나눠주는 ‘응답하라 1988’의 아주머니들, 자기가 더 힘들어짐에도 스스로 자신의 겉옷을 벗어주고, 짐을 들어주는 애인들, 곡식을 모두 나눠주어 곳간이 텅 비게 되는 ‘청빈’의 조선시대의 관리들, 이들의 행동에는 모두 타인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다. 그래서 가난하지만 따뜻하다. 이들은 영리하게 자신의 이해관계를 생각하지 않는다. 경제학적으로 보면 매우 멍청하고 바보 같은 주체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스스로 손해를 자처하니까. 하지만 우리는 이들의 이러한 바보 같음에서 감동하고 아름다움을 느낀다.
“사랑이 끝나는 곳에 정치가 시작되고, 정치가 끝나는 곳에 사랑이 시작된다.” 프랑스 현대철학자 알랭바디우의 이 말을 우리는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정치라는 것은 나의 이익과 손해를 계산하는 행동과 그런 관계를 의미한다. 즉 이해관계를 따지는 관계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사랑은 반대로 그런 것들을 따지지 않는 관계를 의미한다. 이해관계를 따지는 순간 우리는 사랑을 할 수 없다. 아니 사랑을 할 자격이 없다고 해야 더 맞을 것이다. 사랑은 그냥 내 것을 내어 주는 것이니까. 이런 것들이 우리들의 마음을 많이 울리는 것은 어쩌면 우리 사회가 모두 정치의 관계로만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슬픈 느낌 때문은 아닐까.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조금 씁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