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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한현재 Apr 19. 2020

'영원'속에 간직하는 사랑(2)

  때때로 어떤 것이 그러길 바라는 것과 실제 그것의 모습이 불일치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할 때면 쓰디쓴 침을 삼키며 씁씁함을 느끼곤 한다. 어릴적이라고 말하기엔 아직도 젊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가난하고 약한 사람은 선할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반대로 부유하고 강한사람은 분명 어딘가에서 구린내가 날것이라고 굳게 믿었었다. 그런데 약자들의 탐욕스러운 모습, 폭력적인 행태를 보면서, 그러한 믿음은 결코 진실이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다 가진듯해 보이는 저 사람은 도덕적으로라도 흠이 있어야만 하는데, 그렇지 않고 선량함과 포용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끝내 인정할 수밖에 없을 때, 괴로움과 절망이 찾아왔다. 그러면 우리처럼 가진것도 없으면서 도덕적으로 타락한 존재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란 말인가. 하면서 말이다.

  내가 미리 그럴 것이라고 기대하고 바라는 그것은 사실 삶의 어떤 진실도 담보하지 못한다. 그저 내 생각이 멍청하리만큼 순진하고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일 뿐이었다는 것만을 말해줄 뿐이다. 이러한 미숙함이 한 발 더 나가면 상황은 심각해진다. 그러한 기대와 바람에 어긋나는 현실세계의 상황을 목도하더라도 그것은 예외적인 것일 뿐이라며 현실을 부정하기에 이른다. 그러면서 자신의 신념에 알맞은 정보만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공고히 해 나간다. 내 '기대와 바람'이 '진실'의 자리를 참칭하는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다.

  ‘영원한 사랑’이라는 관념도 그런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사랑이 영원할 것이라는 것은 우리의 '바람'일 뿐이지 사랑의 '본질'은 아니라는 생각. 어쩌면 사랑이라는 놈은 원래가 우리가 기대하는 만큼 오래 지속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랑이 영원했으면 하고 바라지만 애초에 그것의 실제 작동 방식은 그렇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 요즘이다. 애초에 ‘영원’이라는 관념이 사랑에 붙은 것이 이것을 반증해주는 것은 아닐까. 원래 그 자체로 영원한 것들에는 ‘영원한’이라는 수식어를 굳이 붙일 필요가 없을 테니까. ‘영원한’이라는 수식어는 실제 사랑이 그러한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기보다, 우리가 그러하길 바라는 마음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한 것 아닐까.

  사랑이 영원했으면 하는 우리의 바람은 한 발 더 나아가 ‘진정한 사랑이라면 영원히 변치 않는다. 변하고 식어버린 사랑은 애초에 진정한 사랑이 아니었던 것이다’라는 괴물을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그러했으면 좋겠다는 기대가 사랑의 본질, 진실의 자리를 꿰찬 것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는 우리의 기대, 소망일뿐이지 실제 사랑의 모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텐데, 왜 이 괴물같은 관념은 지칠 줄 모르고 무럭무럭 자라나는 걸까. 어쩌면 우리는 이미 진실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기가 무서워 계속해서 괴물에게 먹이를 주고 키워온 것은 아닐까. 흉측한 모습을 띤 괴물이지만 진실보다는 내게 희망과 편안함을 주니까.

  우리는 ‘영원한 사랑’의 의미를 재구성해야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언제까지 이 괴물을 품고 살순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다간 나 자신까지 괴물이 될지도 모른다. ‘강신주’라는 철학자는 사랑을 항상 꽃 피우는 것에 빗대어 표현한다. 이보다 멋진 비유를 아직 찾지 못했기에 빌려다 써보고자 한다. 사랑은 꽃과 마찬가지로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구상의 모든 생물체와 같이 변하고 또 사라진다. 이는 사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꽃을 피우는데 있음을 함축한다. 사랑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쁘게 활짝 피워 사랑을 하느냐, 한 번 피워보지도 못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꽃에게 가장 슬픈 것은 언젠가 진다는 사실이 아니다. 꽃으로 태어났는데 한 번도 제대로 피지 못하는것이 가장 괴롭다.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영원할 것 같은 사랑이 식어버리고, 변해 끝나는 것은 결코 슬픈 일이 아니다. 정말 슬픈 것은 사랑인줄 알고 살았는데 사실은 한 번도 제대로 피워보지도 못했다는 사실을 마주하는 것이다.

  우리가 ‘영원한 사랑’을 꿈꾸는 것은 꽃으로 이야기하면 ‘생화’가 아닌 ‘조화’를 꿈꾸는 것이다. 영원히 지지 않는 꽃은 ‘조화’ 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사실 ‘조화’는 꽃이라고 할 수 없다. 한 번도 펴 본적이 없이 태어날 때부터 죽어있는 것을 어떻게 생명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진다는 것은 축복이다. 폈기 때문에 지는 것이고, 핀적이 없다면 질 일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꽃’과 같은 생명을 가진 ‘사랑’에 있어 ‘영원’은 어떤 의미가 되어야 할까.


  ‘영원한 사랑’의 의미는 시간의 수평적 차원이 아닌, 공간의 수직적 차원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죽을 때까지 한 사람만을 변치 않고 사랑하겠다는(사실 다짐일뿐이지만) 그런 시간적 차원의 영원성은 결코 ‘영원한 사랑’의 개념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것은 애당초 사랑의 탈을 쓴 다른 그 무엇이거나, 생명을 갖지 못한, 즉 시작조차 하지 못한 조화에 불과하다. ‘사랑’에 있어 ‘영원성’은 그 진정성과 치열함, 깊이에 있다. 꽃을 피우기 위해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밀어 올리는 싹처럼 말이다. 끝끝내 온몸으로 스스로 피워낸 꽃은 영원성을 획득한다. 경이로운 그 순간을 본 사람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각인 될 테니까. 사랑도 마찬가지 아닌가 싶다. 진정으로 온몸을 다해 사랑해 낸 한다면 그것이 얼마를 가든 가슴 속에 영원히 남는 사랑이 되는 게 아닐까. 그래서 ‘널 영원히 사랑해.’라는 말은 이렇게 독해되어야만 한다. 죽을 때까지 사랑한다는 수평적 차원의 의미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그 누구보다 깊게 그리고 온 마음 다해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강도와 깊이 즉, 수직적 차원의 의미로.

  영화 ‘비포 선라이즈’의 여자 주인공 셀린은 제리에게 자신의 할머니 이야기를 해준다. “할머니는 남편밖에 모르는 분 같았어. 그런데 고백하길 평생 맘속으로 딴 남자를 그리며 사셨다는 거야. 운명에 순응한 거지. 정말 슬픈 일이야. 한편으론 기뻤어. 그녀에게 그런 감정이 있다는 게.” 셀린의 할머니는 남편 말고 다른 남자를 평생 마음속에 그리며 사셨다. 그렇다면 평생을 별로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산 셀린의 할머니는 불행했을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셀린의 할머니는 마음속에 정말 예쁘게 활짝 폈던 꽃 하나를 간직하고 계시니까. 진정한 의미에서 영원한 사랑이란 셀린의 할머니와 같은 게 아닐까. 온 마음을 다해 사랑을 하고 꽃을 피운 그 기억을 가슴속에, 아니 영원 속에 묻어두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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