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원한현재 Apr 30. 2020

사랑을 외상지다

편의점과 구멍가게

“뽀뽀 해줘.” 남자는 빨리 안해 주면 ‘으앙’ 하고 울어버릴 것 같은 7살짜리 꼬마아이처럼 말했다.


그녀는 온몸으로 울어대는 아이에게 장난감을 사주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놓인 어머니처럼 하마터면 뽀뽀를 해줄 뻔 했다. 그러나 곧 정신을 차리고 새침때기처럼 얘기했다.


“내 입술이 얼마짜린 줄 알고 하는 소리야? 안돼.”


앙칼지게 말하면서도 그녀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도대체 얼만데?”


“얼마일거 같은데?”


남자는 이것이 일종의 놀이라는 것도 잊은 채 진지하게 답했다.


“음...... 한 10억쯤?”


여자는 사실 치킨 한 마리정도 사주면 뽀뽀해줄까 하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상외로 너무 큰 금액이 나와서 놀랐다. 그렇지만 그것을 남자에게 들킬 만큼은 아니었다. 여자는 침착함을 유지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발 더 세게 나가면서 얘기했다.


“그것도 성에는 안차지만 너니까 특별히 깎아줄게. 10억만 줘”


남자는 눈을 오른쪽 위로 굴리며 뭔가를 계산하는 듯 하다가 대답했다. 마치 자신의 연봉으로 몇 년을 모아야할지를 세는듯했다.


“그래, 내가 열심히 일해서 갚을 테니까 일단 외상 좀 해줘.”


여자는 그런 남자가 너무 귀여워서 ‘으이구’ 하면서 볼을 꼬집어주고 싶었지만, 마지못해 해준다는 표정으로 뽀뽀를 해주었다.


“꼭 갚아라. 아마 평생 일해도 못 갚을 것 같은데 하는 거 봐서 더 깎아 줄 수도 있으니까 잘해.” 그녀는 마치 밀린 외상값을 언제 갚을 거냐며 장난스럽게 야단치는 주인집 아주머니처럼 말했다.


“그럼 한 번 더 해줘. 그럼 더 열심히 일할 수 있을 것 같아”


  이처럼 귀엽고 사랑스런 놀이가 또 있을까. 바보들처럼 보일정도로 순수하고 순진한 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다. 사랑에 한 번이라도 빠져본 사람이라면 이들처럼 바보 같은 짓 한번쯤 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아니, 이 정도의 바보짓도 해보지 않았다면, 사랑에 빠져봤다고 할 수 없을 테다. 사랑은 아이로 돌아가는 경험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말이다. 아이 같은 이 둘은 이처럼 계속해서 서로에게 외상을 달 것이고, 서로의 외상 장부가 찰수록 사랑은 깊어갈 것이다.


  ‘외상’이라는 방식은 자본주의에서 가장 먼 교환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에서는 철저하게 등가교환과 즉각적인 교환을 원칙으로 한다. 그러나 외상이라는 방식은 ‘믿음’과 ‘마음’이라는 가격을 측정할 수 없는 것을 서로 교환한다는 점에서 등가교환이라 하기 어렵고, 마음으로 시간을 사고판다는 점에서 즉각적인 교환이 아니다. 이러한 차이는 도시의 편의점과 시골의 구멍가게를 비교해보면 확연하게 드러난다. 편의점에서는 철저하게 자본주의의 원칙에 따라 교환이 진행된다. 편의점에서 외상은 불가능하다. 편의점에서 점원과 손님은 철저하게 비인격적 관계로 만나기 때문이다. 편의점 점원은 오늘 나의 감정 상태나 내면이 어떤 빛깔을 내고있는지 관심 없다. 오직 점원이 관심 있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화폐다. 물건 가격만큼의 화폐를 가지고 있느냐, 그리고 그것을 제대로 지불하느냐에만 관심이 있다. 반면 시골 구멍가게 주인아주머니와 손님인 나는 이미 인격적 관계를 맺고 있다. 친구의 어머니거나 어머니의 친구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상이 가능하다. 그리고 내 내면을 아주머니에게 드러내 보일 수 있다. 구멍가게에서 우리는 때때로 “오늘 저 미영이하고 헤어졌어요.”라면서 속내를 드러내고 아줌마에게 위로를 받을 수 있지만, 도시에서는 그럴 수 없다. 도시에서는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기에 이별해도 차가운 방에 찬밥처럼 담겨 혼자 숨죽여 울어야만 한다.



  그렇다고 구멍가게가 따뜻하기만 하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리고 도시의 고독이 부정적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사적인 관계를 맺는 구멍가게에서 담배 사기가 만만치 않다. 담배를 아직도 피우냐는 잔소리를 들어야만 살 수 있거나, 부모님이 말해놓는 경우 돈을 가지고 있어도 살수 없다. 그리고 부모님 몰래 뭔가를 사야하는 것이 있을 때는 멀리 시내까지 나가야 한다. 오늘 몇 시에 와서 뭘 샀는지, 무슨 표정으로 가게를 들어오고 나갔는지 등등 내 모든 정보가 부모님에게 보고될 테니까 말이다. 시골에서는 가까운 만큼 이것저것 다 간섭하기 때문에 사생활이 없다. 이러한 시골적 폭력은 도시인들에게는 끔찍할 만큼 공포스러운 것이고, 아마 하루도 견디지 못할 그런 고통일 것이다. 반면 편의점에서는 익명의 관계이기 때문에 교환 이외의 행동은 불필요한 것으로 여겨지며, 그 이상의 간섭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도시에서는 고독하긴 하지만 사생활이 가능하고 그 안에서 홀로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다.


  외상의 방식은 상대방을 믿고 본인이 대신 일단 그 가격을 지불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친구를 위해 보증을 서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자본주의에서는 이러한 인간간의 유대를 산산이 쪼개놓는다.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다른 것은 믿지 말고 한국은행 총재의 직인이 찍힌 이 종이만을 믿으라고 강요한다. 사실 우리 인간이 서로를 믿는다면 돈은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아무 종이나 가져다가 내 사인이나 도장을 찍어서 주인에게 주고 음식을 먹으면 된다. 나중에 주인이 그 종이를 내밀면 그만큼의 대가를 다른 그 무엇으로 지불하면 되니까. 그러나 자본주의는 그것을 허용치 않을 뿐만 아니라, 서로를 믿지 못하게 인간들을 고독한 개인으로 내몬다. 그리고 친구나 가족이라도 보증은 서는 거 아니라며, 불신과 의심을 조장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과거 내 친구를 위해 그 무엇이든, 심지어 목숨까지도 줄 수 있었던 열정과 낭만, 그리고 사랑을 잃어버렸다. 합리적이고 안전한 방식이라고 하는 것을 따르면서 말이다.


  그래도 아직까지 그 열정과 낭만이 남아있는 곳이 하나 있다. 바로 사랑이다. 사랑의 관계는 자본주의 입장에서 보면 불온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등가교환, 즉각적 교환의 원칙이 철저하게 무시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환의 원리는 사랑의 배신으로 여겨지고 사랑은 이런것들을 오히려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만들어 버린다. 사랑은 내게 손해가 되는 것이어도 상대방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그것을 한다. 그리고 손해를 봤음에도 거기에서 행복과 쾌감을 느끼는 묘한 경험을 제공한다. 사랑은 그래서 스스로 가난해지는 비경제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더 추워지지만, 내가 더 배고파지지만 상대방에게 내 옷과 음식을 기꺼이 내어주는 것이니까. 그리고 거기서 오히려 따뜻함과 포만감을 느끼는 기묘한 경험이니까.


  사랑은 마치 외상을 지고 받는것처럼 기꺼이 상대방에게 부담을 지우기도 하고 부담을 스스로 짊어지기도 한다. 우연히 소개팅 비용에 대해서 남녀가 생각하는 게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고 나서 ‘아,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사랑에 더 민감하고 근접해 있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소개팅에서 여자는 상대방이 마음에 들면 밥이나 술을 얻어먹는다. 그것은 상대방이 내게 무언가를 줬다는 그 부담을 스스로 안는것이고, 그것은 본인이 기꺼이 그 이상을 돌려줄 용의가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반면 남자들은 반대로 생각한다. 상대방이 밥값의 반을 내면 오히려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고 판단한다. 자신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다. 물론 그것을 나에 대한 배려로 읽는 것이 영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 기꺼이 부담을 주고 받는다'는 사랑의 작동원리에 비추어볼 때 그것은 완벽한 오판일 수밖에 없다. 여자들은 상대방이 정말 마음에 안 들 때 반반을 내려고 한다. 이걸로 우리 서로 깔끔하게 정산하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는 의미로 반을 내는 것이다. 좋아하지 않는 상대에게 얻어먹는다는 것은 견딜수 없는 부담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 경우 여자는 자신이 사주면 사줬지, 죽어도 얻어 먹으려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차라리 마음이 편하니까.


  사랑이라는 것이 기꺼이 부담을 껴안는 것이라고 할 때, 남성보다는 여성이 사랑을 더 잘 알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상대방이 내게 뭔가를 줬다는 그 부담을 기꺼이 껴안고 관계를 이어나가고자 하는 마음은 사랑이라고 밖에 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남성들은 지나치게 단순하게 경제적이고 합리적인 계산법으로 사랑을 측정하려고 했고 그러다보니 그만큼 사랑과 멀어졌다. 사랑은 ‘경제적, 합리적’ 이런 말과는 가장 멀리 떨어져있는 단어니까 말이다. 물론 남성들의 입장에서 변호를 해보자면, 남성들이 단순히 사랑을 잘 몰라서 그런 계산법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기존의 우리 문화가 남성이 경제적 부담을 지는 것을 당연시 해왔고, 그것에 꽤나 부담을 느껴온 남성들이기 때문에 그런 정치경제학적 논리에 쉽게 포섭된 것일 뿐이다. 결코 남성들이 사랑을 모른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남성들이 사랑을 위해서 때때로 더 과감하고 바보같아 보일정도의 비경제적 행동들을 해왔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부담을 기꺼이 껴안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되지만, 기꺼이 부담을 지우는 것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뭘까. 물론 사랑의 핵심부에 닿아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상대방에게 부담을 지우는 행위는 이기적이고 반사랑적인 행동으로 보일 것이다. 사랑은 부담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부담을 내가 껴안는 것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하지만 상대방에게 부담을 지우는 행위는 그만큼 상대방을 믿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고, 본인도 상대방으로부터 그 이상의 부담이 올 때 그것을 감당할 마음이 있을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상대방이 힘들 것을 알지만, 내가 그 사람에게 기대고 의지하는 것은 단연코 사랑이다. 그래서 이것은 결코 상대방을 자신의 이기심으로 이용하겠다는 의지가 아니다. 오히려 그만큼 나는 당신을 사랑하며, 이 이상을 당신이 내게 부담을 지워도 나는 기꺼이 그것을 감당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래서 우린 미안해 하면서도 상대방에게 기대고, 버텨준 상대에게 고마워한다.


  사랑은 이처럼 부담을 지우고 받는 관계 즉, 서로 외상 지는 관계이다. 미안해하면서 그리고 고마워하면서 상대에게 부담을 안겨주고 외상 장부에 내 이름을 기록하는 것이다. 상대방은 그것을 또한 기꺼이 받아준다. 왜냐면, 내가 사랑하는 이 사람도 예전에 내 짐을 기꺼이 받아주었고, 앞으로도 기꺼이 받아줄 사람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에. 슬프게도 나의 사랑에 대한 착각은 여기서 비롯됐다. 그동안 사랑하면 상대방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는 것이라고만 생각해왔다. 그리고 상대방의 부담만 껴안으려고 했었다. 그러다 지쳐서 항상 먼저 헤어짐을 고했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은, 사랑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숭고한 내 모습에 취해 했던 행동이었지, 정말 그 사람을 위한 사랑은 아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 번도 진심으로 상대방을 믿고 내 스스로를 상대방에게 온전히 맡기고 기대지 못했다. 그것은 반대로 얘기하면, 그만큼 상대방이 온몸을 던져 내게 기대는 것도 허용치 않겠다는 경계를 그은 것이었다. 불행히도 나는 한 번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사랑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동안 내가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은 한쪽에만 외상장부가 채워지는 이상한 형태의 사랑이었다. 그리고 그 외상장부가 다 찼을 때, 난 못 견디고 도망쳤다. 왜 상대방의 외상장부에 내 이름을 기록하려하지 않았을까. 아니 왜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 내 안의 깊은 고독이 진심으로 상대방을, 아니 사랑을 믿지 못하게 만든 것일까. 오늘도 외상장부는 바람에 펄럭일 것이다. 언젠가 나도 두 사람의 외상장부가 같이 채워지는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영원'속에 간직하는 사랑(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