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교육 to TMI...
여러 의학 드라마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수술장에서의 이미지는 '삭막', '긴장', '긴박감' 등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 같다.(물론 난 의학 드라마를 본 적은 없지만 일반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느낀 점이 그러하다) 물론 교수님에 따라, 수술의 난이도에 따라 수술장 분위기는 천차만별이지만 내가 겪어왔던 대부분의 수술에서 루스해지는 타이밍이 분명 존재했다. 예를 들어 수술이 다 끝난 후 봉합하는 과정이라든지, 수술 중간에 병리 검사를 기다리는 도중이라든지, 교수님 수술이 2방에서 열려 다른 방에 계신 교수님을 기다리는 순간이라든지... 수술장도 사람이 사는 곳(?)이다 보니 이럴 때 잡담을 하며 지루함을 달래는 경향이 있다. 보통 그럴 때 다음과 같은 주제가 이끌려나온다.
1. 병원 이야기
참으로 안타가운 이야기이지만 대학병원에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병원 안의 사람들과만 교류하고 살아가는 듯 하다. 이것은 의과대학 시절부터 바쁘다는 이유로 외부 사람들과 단절되어 온 비극적인 역사가 의사가 된 후에도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나눌 수 있는 이야기의 주제도 병원 안에서 일어나는 일로 국한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지 병원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그 전파성이 마치 요즘의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무섭도록 빠른 경향이 있다. 그것이 중요하든, 중요하지 않든간에. 보통 수술장 안에서 재잘되는 이야기들이 수술 필드 바로 옆에 있는 마취과 선생님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면 그 마취과 선생님들은 소문A를 기억했다가 다른 마취과 선생님과 만나 소문B와 교환하게 된다. 인턴하면서 유독 느낀 점이 마취과가 소문의 Hub가 된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병원의 모든 소문을 알게된 마취과 의사들은 다른 과의 친구들 및 선배/후배에게 그 소문을 전달하게 되어 곧 병원 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 소문을 알게끔 퍼뜨리는데 일조한다.
조그만한 소문도 곧바로 퍼져버리는 것 때문인지 병원 사람들은 튀는 행동을 하는데 유독 소심한 경향이 있다. 소문이란게 점점 덩치를 불려나가는 경향이 있어 나는 1만큼의 잘못을 해도 어느샌가 10만큼의 잘못을 한 '짱돌'이 되어 있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것이다. 나만의 의견을 내기보단 앞선 사람들이 하는 것을 따라하며 윗사람들에게 꼼짝 못하고 따라야 하는 위계질서가 나는 참 답답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2. "인턴은 요즘 뭘하나?"
인턴이나 학생들은 수술장 사람들에게 있어 새로 유입된 깨끗한 물과 같다. 사실 수술장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이미 고일 만큼 고인 사람들이라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 수도 있겠다. 새로운 사람들에게 관심이 가지만 그들에게 창의적인 질문을 할 사람들이 없다는 것 또한 문제이다. 보통 학생들에겐 요즘 뭐하는지, 관심 있는 과는 무엇인지 물어보고, 인턴에게는 요즘 뭐하는지, 지원하고 싶은 과는 무엇인지 물어본다... (음?)
질문은 같지만 대답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학생은 위대한 존재이기에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다. 요즘 재밌게 보는 드라마가 있으면 그걸 말할 수도 있고, 진짜로 가고 싶은 과를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턴은 약간은 눈치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물론 그것은 위대한 존재에서 1년만에 병원 제일 하층민이 되어버린 이유가 작용하기도 하지만. 그래서 교수님의 의향이 무엇인지를 한번 짚게 되고, 내가 여기서 어떤 대답을 하는 것이 현 상황에서 모두를 불행하지 않게 만들 수 있는지를 판단한다. 여기에선 교수님 factor가 가장 크게 작용하기에 교수님께서 평상시에 하시는 말씀이나, 다른 레지던트 선생님께서 그 교수님을 대하는 태도등을 참고한다. 그리고 가고 싶은 과에는 그 교수님의 과를 포함시키는 것도 잊지 않는다.
3. 학술적인 내용
교수는 연구하는 직업이다. 특히 유명 대학병원에 계신 분들은 진료도 중요하지만 연구에 목숨을 거는 분들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래서 수술 중에 질문을 하는 경우가 많다. 수술과에서는 지금 하는 과정이 무엇이며, 어떤 질환에선 어떤 치료를 쓰는 것이 어떤 이유로 합리적인지를 알아야 한다. 가끔은 숙제를 주시는 경우도 있어 논문을 읽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인턴에겐 별로 기대를 하지 않기에 질문을 받아 본적이 손에 꼽지만 학생땐 꽤나 있었고, 레지던트 선생님들께 질문하는 경우도 종종 봤던 것 같다.
가끔 어떤 내용의 논문 쓰고 계신지를 여쭤보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줄줄 얘기해주시는 경우가 있다. 이 때 그분들의 표정을 보면 마치 신난 아이같은 모습이다. 확실히 공부하는데 도가 트신 분들이다.
이 외에도 여러 Minor한 내용들이 있겠지만 위 3가지가 정말 대부분이었다.
수술방이란 곳은 생각보단 덜 삭막하고, 덜 긴박하며 생각보다 사람 사는 느낌이 물씬 풍기는 곳이다.
그리고 또한 작은 사회여서 그 좁은 곳, 그 적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여러 정치적인 작동이 일어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