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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현승 Nov 07. 2021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 나희덕_(아내와 딸과 함께)

가족과 함께 시를 낭송합니다 04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 나희덕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꽃과 분홍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서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여러 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여보, 오늘 시 한 편 낭송 어때? 괜찮은 시를 만났어."

"좋아, 오늘은 좀 피곤해서 그냥 낭송만 할게."

"시 이야기는 안 해도 돼. 시를 읽는 것 자체가 어디야. 고마워."


처음에 시를 낭송해 보자고 했을 때는 너무 쑥스러워 하던 아내가 오늘은 흔쾌히 수락을 했네요. 이미 저는 괜찮은 시를 약 200편 이상 만나고 있답니다. 혼자 보기가 너무 아까워서 아내와 함께 시를 읽자고 하고 있어요. 초6 딸과도, 초2 아들과도 시로 만남을 시도하고 있는 중이에요. 시를 들고 아내와 아이들에게 다가가고 있지만 서두르지 않고 사뿐사뿐 천천히 가까이 가려고 해요.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는 느낌이 요즘은 많이 들어요. 함께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것, 이야기 나누고 싶은 것이 참 많네요. 그 중에서 시를 선택한 이유는 시가 주는 묘한 매력이 있어서예요. 아들과 동시를 번갈아 가면서 낭송하면 그냥 재밌어요. 이제 사춘기에 접어드는 딸과 시를 함께 읽으면 서로 거리가 좁혀지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아내와 같은 시를 함께 소리 내어 읽으면 왠지 마음이 환해져요. 아내와 딸과 아들의 시 읽는 목소리를 녹음해서 들으면 감동이 두 배, 세 배 더 밀려들어요. 


잠들기 전 딸에게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시를 함께 낭송해 보면 어떨까 물었어요. 

"은결아, 아까 저녁 때 엄마와 함께 시를 낭송했는데, 느낌이 괜찮았어. 시가 주는 느낌이 왠지 따듯하더라고. 한번 낭송해 보면 어떨까?"

딸이 "좋아" 하는 순간, 저는 재빨리 노트북을 켜서 유키구라모토 <lake louise>를 틀었습니다. 낭송을 하는데 너무 빨리 읽는 듯해서 조금만 속도를 줄여보자는 손짓을 했네요. 


오늘은 아내와 딸과 함께 나희덕 시인의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를 낭송한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사람마다 행복이 찾아오는 모습이 다르잖아요. 행복이 제게는 이렇게 찾아오네요. 시 한 편 함께 낭송하고, 낭송한 시를 다시 들으면서 잠을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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