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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 Mar 29. 2018

당연했던 이름, 희생

어느 66년생의 이야기

# 본 글은 인터뷰를 토대로 쓴 글입니다.



권선영(53, 가명) 씨는 1966년 7월 22일, 대전에서 태어났다. 그는 농사를 짓던 부모 아래 장녀로 태어났다. 위로 오빠가 하나 있고, 아래로 여동생이 넷 있다. 이혼한 작은 집에서 기저귀 찬  채로 온 두 아이를 포함하면 한 집에 10명이 함께 살았다.


“허억... 애들이 총 8명이나 됐나요?

 놀람 섞인 나의 질문에 그녀는 덤덤히 대답했다.     


“다 키워준 것만 해도 부모님께 감사하죠. 옛날에는 다른 집도 다 그랬고, 형제가 많았으면 옛날에는 갔다 버리는 경우가 많았어요. 다른 집 보내고, 식모살이 보내고...”     


그녀의 웃음기 없는 진지함에 '설마요'하는 의구심은 잦아들었다. 20대 중반을 갓 나선 나는 ‘그땐 그랬구나’하는 심정을 갖는 거 외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자연스레 그의 어린 시절이 궁금해졌다.


봄이 보이는 풍경(1951),  이중섭


# 당연했던 이름, 희생

“어릴 때 얘기를 좀 더 듣고 싶네요!”     


기대감에 부풀어 터무니없이 뭉뚱그려 질문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꽤 오래전 기억이기 때문일까. 그는 어린 시절에 대한 여럿을 드문드문 쏟아냈다. 마치 기억의 조각을 맞춰가는 듯 보였다.



장녀,

책임감,

일상이었던 농사,

빨랐던 사회생활,

그만큼 짧게 느껴졌던 학창 시절,

그리움,

미련.     



선영 씨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동생들 도시락을 싸야 했고, 여물을 쓸고 나서야 학교에 갔다. 학교에 다녀오면 부모님이 농사일을 하기에 밥 짓는 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당시에 해야 했던 일들의 묘사 앞에 '제가 젤 컸으니까...'란 말을 붙였을 뿐이다. 장남이었던 그의 오빠는 어릴 때부터 학업을 위해 논산에 따로 살았다. 장남은 잘 교육시키자 부모님의 뜻이자 사회의 분위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선영 씨는 부모에겐 마냥 딸일 수 없었고, 형제들에겐 마냥 형제 일 수 없었다.


     


그런 그는 실업계 고등학교인 충일여고에 진학했다. 당시의 실업계 고등학교는 지금의 그것과 의미가 달랐다고 한다. 충일여고의 경우, 충남방적이라는 섬유회사가 교육재단을 만들고 개교한 산업체 부설 고등학교였다(2004년 충남방적이 망하면서 폐교됐다).  



충일여고로의 진학은 불변의 진리인 듯 여겨졌고, 자연스레 진행됐다. 그는 학교를 다니면서 충남방적에서 삼교대로 일했다.


고등학생 때의 그의 하루(일주일마다 변경)

- 출근(오전 5시 30분 ~ 오후 2시 30분), 그리고 등교.

- 낮에 등교, 그리고 출근(오후 10시 ~ 오전 6시).

- 아침에 등교, 그리고 출근(오후 2시 ~ 오후 10시).


언뜻 들어도 16살 아이에겐 버겁게 들렸다. 3년 간 그의 삶에서 변화란 일주일마다 바뀌는 시간표뿐이었다.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다. 몸이 고된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적어도 확실했던 건 "이 일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이었다. 그런 그는 대학에 가고 싶어 졌다. 다른 하고 싶었던 것이 정해져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대학에 가면 '내 것'을 찾을 것 같은 기대감이었다.



그런 선영 씨는 시간이 날 때마다 공부를 했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공장에 출근하기까지, 퇴근하고 학교 수업이 시작하기까지, 그는 학교에서 책을 폈다. 조금의 틈만 나면 주판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학기 중이던 방학이던 자꾸만 선생들을 찾아가 괴롭히는 학생이었다. 그의 노력을 본 간호 장교 출신의 교련 선생은 선영 씨의 집에 '그를 대학에 보내야 한다'는 전화를 하기도 했다. 그 열정은 학력고사까지였다.



학력고사를 봤지만 점수를 확인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하기 싫었다.



그는 학력고사를 치고 나서야 대학이 욕심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어쩌면 잊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3년 내내 짬을 내어 공부를 할 때면 노력하면 손에 잡힐 것만 같던 대학이었지만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일을 해야만 했다. 돈을 벌어야 했다.


그렇게 선영 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전 시내의 한 옷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된다. 옷들이 나오면 달음질 확인하는 등 제품 검사를 하고 포장에 넘기는 일이었다. 그것은 지금의 남편을 만나 인천으로 오기까지 5년이었다.




어느 누구의 강요는 없었다. 굳이 말을 붙이자면 환경의, 사회의 강요랄까?

그가 해야만 했던 일들은 그에겐(어쩌면 당시의 그와 같은 사람들에게)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졌고, 당연한 것이었다.

그래서 원망의 대상 또한 있을 수 없었다. 마음으로 삭혀내야 했고, 스스로 견뎌내야만 했다.
그렇기에 미련은 더욱 쉽게 가실 수 없었다.



"학업에 대한 미련은 여전히 있죠. 내 부모는 누구보다 노력하는 부모였기에 부모가 원망스럽지는 않아요. 그래도 미련만큼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런 그는 가정을 꾸린 후에도 미련은 미련으로 남겨뒀다. 남편에게 의지하고 싶지 않았기에, 두 아들에게 남이 해주는 것만큼은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슬펐다. 당연하게 가져야 했던 책임감, 무거웠을 그것을 지녔던 어릴 적 그에 대한 감정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당연한 것이었다"란 그의 마음가짐이 무거웠던 책임감을 들쳐 매야 했던 현실에 대한 체념은 아니었을까? 


선영 씨의 이야기를 듣고, 내 머릿속엔 '희생'이란 한 단어가 맴돌았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다는 말을 하는 선영 씨지만, 선영 씨가 있었기에 동생들은 인문계 고등학교란 선택지를, 그중 몇몇은 대학 가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두 아들은 말할 것도 없겠다.



그래도 선영 씨와 이야기를 나눌 당시에 '희생'이란 단어를 내밀었다면 거부당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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