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yejin Kim May 11. 2018

게이 스트리트, 그리고 로마의 동성애

원로원과 국민을 위한 로마, 동성애자에게도 열린 도시였나? 

로마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정처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다 우연히 무지개 깃발이 걸린 거리를 지난 적이 있다. 


무지개 깃발은 평화의 상징과 함께 성소수자 LGBT(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의 줄임말로 성소수자를 일컫는 단어)를 상징하여.. 단박에 게이 스트리트인 것을 알아차렸다. 나름대로 LGBT에 열린 마음이라고 생각한 나였는데, 고대 로마를 대표하는 건축, 다시 말해 약 2,000년의 역사를 가진 고대 유물 콜로세움과 불과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위치에서 게이 스트리트를 발견한 건 조금 충격적이었다. 역시 '벽장 속 게이'가 익숙한 한국인인 건가 싶었다. 

지하철 B선 Colosseo역 5분 거리에 위치한 gay street 

via San Giovanni in Laterano

콜로세움과 라테란 성당이 이어지는 거리이다. 공식적으로는 2007년에 지도로 표시되어있는 약 300m의 구간을 gay street으로 지정하였는데, 이미 60년대부터 콜로세움 주변은 LGBT 커뮤니티의 비공식적인 만남의 장소였다고 한다. 



이 글을 보고 흠칫 놀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이 있고 사랑이 있다면 성소수자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심지어 바티칸 투어나 시내 투어에서 종종 언급되는 로마의 몇몇 황제들도 동성애를 했다고 전해진다. 

그리스도 박해를 시작했던 폭군의 대명사 네로 황제

네로 황제(재위 : AD 54-68)는 정신분열증을 앓았을 것이라 주장하는 학자가 있을 만큼 극악무도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다. 일례로 임신 중이었던 둘째 부인 사비나의 배를 발로 차 부인과 뱃속의 자신의 자식을 잔인하게 살해하기도 했다. 이후 자신의 행동에 막심한 후회를 하며 지내던 네로는 사비나와 똑 닮은 어린 청년, 스포루스에게 사랑에 빠진다. 당시 동성결혼이 불가했기 때문에 스포루스를 거세시켜 결혼식을 강행했다고 하는데, 이 부분이 가장 흥미롭다. 네로는 스포루스의 물리적 성에 끌렸던 것이 아니라 단순히 스포루스라는 사람, 인격체 그 자체를 사랑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가 로맨티스트였다는 것은 아니다. 스포루스는 역사적 기록이 있는 최초의 트랜스젠더인데, 자의가 아닌 네로의 강압으로 성별을 바꾼 것이다. 대체 무슨 죄인가? 네로는 분명 손꼽히는 최악의 황제가 맞다. 



평화의 로마 Pax Romana를 이룬 5현제 중 세번째인 하드리아누스

하드리아누스 황제(재위 : AD 117-138)는 평화의 로마를 다스린 인물답게 문무에 정통했을 뿐 아니라 수학, 기하학과 더불어 건축과 예술에도 실력이 있었다. 천사의 성, 판테온, 근교 도시 티볼리 등 그가 로마에 남긴 유물들은 중 현재까지도 전 세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니 로마 역사상에서 하드리아누스 황제만큼 다각적인 재능을 가진 인물이 드물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그 역시 아내 사비나를 두고 안티누스라는 어린 그리스 청년에게 사랑에 빠졌다. 이후 로마제국을 순회할 때 언제나 안티누스와 동행했으며 그가 20살의 어린 나이로 이집트 나일강에 빠져 죽었을 때에는 아이처럼 목놓아 울부짖었다고 한다. 죽은 안티누스를 기리기 위해 나일강 건너편에 그의 이름을 딴 도시 '안티노 폴리스'를 건설하였고 또 그를 신격화해 사람들로 하여금 신으로 섬기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왼쪽부터 안티누스, 하드리아누스, 사비나

현재까지도 세계 많은 박물관에서 안티누스와 하드리아누스, 사비나의 석상이 함께 전시되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로마 황제들 이전의 고대 그리스 철학자, 예술가 등 많은 인물들 역시 동성애를 했다. 

이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 파이데라스티아(παιδεραστία)라는 개념과 관련이 있다. ‘파이스’는 소년, ‘에라스테스’는 연인이라는 뜻으로 어린 소년을 애인으로 삼는 고대 그리스의 풍속을 가리키는 말이며, 성인 남성이 소년의 멘토로서 교육과 삶의 전반적인 문제에 대해 조언과 도움을 주는 긍정적인 관계를 의미한다.



하지만 로마제국 멸망 이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한 기독교가 공인, 380년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한 기독교 국교화 이후로 동성애 처벌이 시작되었고, 538년 유스티아누스가 '자연에 반하는 행위를 하는 자, 신을 모독하는 자' 단순화하여 단정 지음으로써 그들을 향한 박해가 본격화되었다. 

흔히 기독교에서 동성애, 동성애자를 소도미(Sodomy, Sodomist)라 칭하는데 이는 성경 구약 소돔성의 멸망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다. 창세기 19장의 내용으로 소돔성을 지키던 롯이 지나가던 두 나그네를 집으로 초대했는데 소돔의 모든 남성이 찾아와 그들을 에워싸며 겁탈하려 하자(이 구절에서 겁탈로 해석된 동사가 'yadah 야다'인데 히브리어로 '알다', '경험하다', '관계하다' 등 다양한 뜻으로 해석된다.) 그들이 눈이 멀고 롯과 그의 가족을 제외한 모든 성읍의 사람들이 불에 타 죽어 소돔성이 멸망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즉, 기독교에서 동성애자를 Sodomist라고 부르는 것은 동성애가 세상의 멸망을 불러올 만큼 커다락 죄악이라고 해석하는 셈이다.

1482년 스위스 취리히의 동성애자 화형식

신본주의 사회였던 중세시대에는 동성애를 저지른 사람, 특히나 남성들은 죄를 저지른 신체기관에 날카로운 막대를 집어넣는다거나 절단해버리는 등의 극한의 고통을 받은 후 사형시키는 등 잔혹하게 처벌당했을 뿐 아니라 자연재해와 질병의 원인으로 손꼽혔다. 동성애가 육체적 쾌락만을 탐닉하는 죄악으로 간주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에이즈가 동성애자들만의 질병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18세기 후반부터 세상이 바뀌고 변화가 일어났다. '피해자가 없는 범죄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프랑스를 기점으로 점차 동성애 차별법이 폐지되기 시작한 것이다. 1957년 영국 정부는 '성인 사이에 합의한 사적인 동성 간 성행위는 더 이상 범죄 행위로 취급받으면 안 되며 동성애자들은 동성애 증상 이외에 어떤 정신적 문제도 없기 때문에 동성애를 질병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보고서를 내놓기도 한다. 

이에 힘입어 19세기 말부터 성 소수자들의 인권투쟁은 끊이지 않았다. 그 결과, 2001년 네덜란드에서 최초로 동성결혼을 합법화하였으며 이후 벨기에, 영국, 덴마크, 핀란드, 아이슬란드, 포르투갈, 스페인 등 유럽의 많은 국가가 차례로 동성애를 합법화를 시행한다. 동성 결혼, 입양 허용, 군 복무 등 국가마다 법률은 조금씩 다르지만 2017년 현재까지 35개국의 성 소수자 및 동성 커플들이 법률 제도 안에서 보호받고 있다. 

동성애자들을 화형 시켰던 많은 유럽 국가들이 지금은 동성애에 관대한 나라로 분류되는 것을 보면 조금 아이러니하다. 



그리고 지난 2016년 5월 11일 드디어. 

서유럽에서 유일하게 동성 결합을 법적으로 불허하던 이탈리아도 시민결합(결혼과 유사한 법적 제도. 배우자로서의 권리를 보장)의 형태로 동성애자들을 법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울타리를 만들었다. 잠든 이탈리아의 시민의식을 깨우겠다며 자명종을 들고 길거리로 나온 동성애 지지자들은 고대 유물 앞에서 로마 쓰여진 새로운 역사에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가을이 만연했던 지난 일요일, 다시 한번 게이 스트리트를 찾았다.

라테란 궁 뒷편으로 콜로세움이 보이는 골목

via San Giovanni in Laterano 라테란 궁 뒷편으로 이어지는 거리를 따라서

콜로세움에 다다를때쯤 주위를 둘러보면

무지개로 물든 가게들을 찾을 수 있다.

왼 : My bar/ 오 : Coming out 여느 식당과 다를 바 없는 낮의 모습

2001년 오픈한 My bar는 평범한 카페 겸 식당이었으나 현재는 게이가 오픈한 Coming out와 협업하여 밤이 되면 게이를 위한 펍으로 운영되고 있다. 밤의 거리는 사뭇 다른 분위기라고 하니 콜로세움에서 야경을 보러간다면 길 건너편에 휘날리는 무지개 깃발을 발견할 수도 있다. 


동성애자들도 어두운 박해의 역사가 있다. 수많은 연구결과도 있지만 무엇보다 역사 속 그들을 겨누었던 잔인한 박해와 매정한 시선, 차가운 배척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 자체만으로 동성애가 후천적 실천이라기보다 선천적 본성임을 증명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누군가는 이 글을 읽으며 불편함을 느꼈을 지 모른다. 그러나 그 불편함 속에 자리잡은 혐오와 차별은 비단 동성애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장애, 인종, 직업, 학벌, 가난등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글을 쓰며 나 스스로도 나와 다른 누군가를 보았을 때 느낀 거부감, 극단적으로는 혐오를 절대적 잣대로 삼아 혹은 절대자의 힘을 빌려  그들의 자유를 제한하려 하지 않았나 다시금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모두가 살아면서 사회에서 다수자에 속할때도 있고, 소수자에 속할때도 있다.


사랑 역시 그러하다. 


'여성과 남성의 사랑'이 다수에 속할 수는 있으나 세상에 단 한가지 종류의 사랑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반드시 틀린 것은 아니고, 나와 같다고 해서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라는 

그 자명한 사실을 소수자도 군림하지 않고 관용했던 도시 로마에서 한번쯤 생각해봐도 좋을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세상과 당신의 세상 무게는 다르지 않다는 것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