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없다는 건 핑계야. 운동은 시간을 내서 하는 거지.
이 문장이 폭력적으로 느껴졌던 적이 있다. 2018년 쯤이었다. 당시 나는 아침 8시30분까지 출근해 오후 10~11시에나 퇴근하는 공연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운동을 등록할 수 있는 시간대는 꼭두새벽 혹은 주말반이 가능했다. 그 때 내가 재미있는 운동을 찜한 건 발레였는데, 집 근처에는 시간대가 맞는 학원이 없었다. 물론 더 먼 곳에 있는 학원에 등록하거나, 개인레슨을 받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그 정도의 시간과 금전적 비용을 감수할 마음의 여력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운동을 할 시간이 정말 없을 수도 있지! 그런 나에게, 시간이 없는 걸 핑계라고 하다니! 폭력적이어도 너무 폭력적이었다.
게다가 우리의 SNS 문화는 어느 새 모두가 멋진 몸 사진을 게시하고, 격려하고, 자극받는 분위기가 돼 있었다. 거기에 동참할 수 없다는 것도 묘하게 불편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의 취미 목록에 ‘운동’은 명함도 내밀지 못했다. 즐겨야 할 취미가 많았다. 재즈 피아노 레슨을 받고, 밴드 합주도 하고, 드라마도 열심히 챙겨봐야 했으니까.
그럼 잠을 줄여. 더 열심히 사는 사람들도 많은데.
시간이 없다는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내며,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속마음 중 하나. 미디어에는 열심히 살아 온 사람들이 참 많이 등장한다. 취미를 직업이 될 만큼 열심히 한 사람, 시작은 남들보다 늦었지만 두 배로 노력해 엄청난 경제적 성공을 이뤄낸 사람 등등. 그러한 열정을 전시하는 콘텐츠들도 어떤 면에서는 폭력적이라고 느꼈다. 난 지금도 충분히 열심히 살고 있는 것 같은데, 이들 같은 ‘성공’을 이뤄내지 못했다는 사실에 실은 나는 뼈를 맞은 듯 아팠었나.
‘지금보다 더 열심히 살으라고?’ 받아들이기보다 저항하고 싶었다. 마치 ‘아프니까 청춘이다’ 같은 메시지였다. 이들의 성공담은 귀감이 되는 하나의 사례다. 그러나 모두가 따라야만 하는 정답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성공스토리가 빠르게 공유되고 끊임없이 회자되는 SNS의 문화는 그런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나같은 사람에게는 '너는 충분히 열심히 살지 않았다'는 메시지로 다가왔다.
다리 밑에서 춤을 추던 사람들을 보고
두 문장을 최근 다시 생각하게 됐다. ‘다리 밑 차차’를 보고 나서다. (내가 좋아하는 이모티콘 다람이의 원작자인 재수 작가가 그린 동명 제목의 작품이 있긴 하지만, 내가 말한 건 정말 '다리' 밑에서 ‘차차’ 춤을 추던 사람들이다.) 집 근처에 작은 하천이 있다. 재택근무 여파로 외부 활동이 적어진 나는 최근 2주 간 저녁마다 나가 뛰었다. 그러다 다리 밑에 모여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을 마주쳤다. 코로나19로 실내에서 모임을 가질 수 없게 된 동호회 사람들일까. 학원 수강생들일 수도 있겠다. 그들이 누구였든, 코로나에 춤을 추는 기쁨을 빼앗길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이들은 춤을 추기 위한 시간만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공간까지 만들어낸 셈이었다.
‘핑계’라는 앞 문장을 지워내고 보면, ‘운동은 시간을 내서 하는 것’이라는 조언은 당연한 말이다. 집에서 꾸준히 하는 30분의 스트레칭도 운동이다. 내가 그 정도 시간을 만들어낼 여유도 없다는 건 정말 핑계다. '열심히'라는 말을 꼬아듣지 않으면 좋은 자극제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2년 전의 나는 운동할 시간이 없다기보다는 시간이 있어도 운동에는 내어줄 수 없었을 뿐이다.
앞으로 더 열심히 살게 될까요?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더 열심히 하자'는 다짐일까? 아니다.
다리 밑 차차로부터 얻은 교훈은 이 순간 내가 더 좋아하는 무언가에 집중하는 데 죄책감을 느끼지 말자는 것이다.운동을 할 시간을 낼 수 없었던 건, 그렇게 낸 시간에 하고 싶은 또 다른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운동하는 삶’을 바람직한 것으로 여길 때, 나에게는 운동보다 중요한 게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운동말고 중요한' 그 다른 것을 하기 위해 운동을 하지 못하면 무의식 중에 죄책감을 느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을 내서 운동을 해야 한다’는 말이 폭력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저 '그 시간에 난 다른 걸 하고 싶어'라고 대답하면 될 일이지,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었는데 말이다.
그러던 내가 요즘 그 어느때보다 홈트를 열심히 하고 있다. 재택근무 덕분이다. 움직이기 위해 운동을 한다. 그러다 보니 이번엔 반대로 피아노를 전보다 많이 못친다는 점에서 또 다른 죄책감을 느낀다. 취미 생활이 경제 활동으로 이어진 사람들을 보며 나도 비슷한 꿈을 꾸어왔는데, 그 꿈에서 계속해서 멀어지고 있다. 그런데 꼭 그런 성공을 이뤄내야만 하는 건 아니잖아. 언제부터 취미에도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던 걸까.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목적으로, 좋아하는 것을 온전히 좋아하기. 20대 때부터 다져 온 나름의 모토였는데, 여지껏 제대로 실천을 못하고 있었다는 게 내가 얻은 교훈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해마다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기로 했다. 순간 순간 좋아하는 것들을 하면 된다. '시간을 내서' 꼭 운동이 아니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그 무언가를 하면 된다. 그리고 즐거움을 느낀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드라마를 보느라 운동을 못했다고 죄책감을 가지지 말며, 운동을 하느라 악보를 그리지 못했다고 자책하지도 말 지어다. 100세 시대를 살아야 하는데, 취미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