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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쑥갓쌤 Mar 23. 2020

불어과 학생을 수학쪽집게로 바꿔 준 비법

수학은 내겐 적이었다. 그것도 철천지 웬수! 


난 학력고사 세대다. 문과여도 수학 배점이 꽤 컸던 걸로 기억한다. 통계 200문제, 함수 300문제, 방정식 300문제를 외워도(원래 외우는 데는 일가견이 있었다. 어릴 때는 걸어다니는 TV편성표였다.) 숫자만 바뀌면 완전 다른 문제가 되 버리는 데 마치 마법사와 싸우는 머글이 된 것처럼 막막했다. 


수학을 피해 문과를 선택했고, 수학을 피해 대학을 골랐다. 국어교육과, 최상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범대가 그렇게 적성에 안 맞을 줄이야. 결국 재수를 결심했다. 대입을 다시 치르려니 수능으로 바뀌어 있었다. 수학을 다시 공부해야하는 상황. 나에게 한 가지 희망은 나이였다. 고등학생때보다 나이를 먹었으니 그 사이에 공부능력이 성장하지 않았을까? 하는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역시 이해력이 상당히 높아져 있었다. 문제는 암기력이 떨어졌다는 것. 이젠 더이상 수학점수를 암기에 기댈 수없었다. 노량진 학원가를 이잡듯이 뒤져서 나한테 맞는 수학샘을 찾느라 발품깨나 팔았다. 쌤~ 죄송합니데이. 귀한 성함 까먹었어유~. 죄송한 마음 잠시 접고, 수학샘 덕분에 회복한 내 수학능력을 이야기 해 보겠다. 


집합만 공부해서 앞부분만 새까만 정석을 들고 교실에 갔더니 "개념노트 준비해. 귀로 공부하는 거 아니야. 그리고 수학은 연습장에 문제만 많이 푼다고 느는 거 아니구. 개념에서 시작해서 개념으로 끝나는 거야." 노트라구? 고등학교 3년간 오답노트는 써 봤어도 개념노트는 한 번도 안 써 봤었는데.


6개월간 일반 정석 한 권이 개념노트 6권에 들어갔다. 이게 내 신주단지가 될 줄 꿈에도 몰랐다. 학교 다닐 때도 국사 수업을 노트에 정리해 암송하는 걸 즐겼었는데, 수학개념도 입으로 암송하기 시작하니 생각보다 착착 붙더니 필요할 때 머릿속에서 불러오기가 가능해졌다. 문제를 풀다가 '아~ 이 개념이 뭐였지?' 바로 개념노트를 찾아보았다. 어느 새 6권의 내용이 언제든지 꺼내는 게 가능한 수준이 되니 문제 속에서 개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샘이 알려준 개념에 내가 살을 붙이기 시작했다. 내가 틀린 문제에 개념노트 번호를 적어가며 오답노트를 만드는데 그렇게 재미있을 줄이야. 그 해 여름이 엄청 더웠다. 식구들은 모두 휴가가고 없는 빈 집에서 에어컨도 없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목에 수건 감고, 대야에 냉수 담아 발 담가 더위를 식히며 수학문제를 푸는데 '몰입'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개념노트의 힘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두번째 대학 합격 후 갑자기 고등학생 수업이 늘었다. 엄마학원에서도, 동네 과외에서도. 물론 수학이었다. 대학 이름 때문은 절대 아니겄지? 고등학생. 몇 년 전만해도 난 절대 고등학생은 못 가르친다고 손사래를 쳤을 텐데. 믿는 구석이 있었다. 내겐 마법의 개념노트가 있었으니까. 


내가 가르친 고등학생들은 교대지망생, 고대지망생, 연대지망생 등이었다. 이 친구들의 특징이 다른 과목은 성적이 나오는데 수학만 점수가 안 나온다는 것. 이미 내가 지나온 길이다. 나는 그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수학을 잘 하던 사람이 아니니 그들이 얼마나 답답한 심정인지 알 수 있었다. 


수학이라는 게, 성적이라는 게 오르려면 무엇이 제일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그건 바로 본인의 의지다. 의지가 생기려면 말 몇 마디 구슬러서 될 일이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회복해야하고, 마음을 열고 조언을 받아들이는 순간 의지를 북돋울 수 있다. 


그들에게 난, 조그맣고 볼품없는 뚱땡이 대학생 과외샘이었지만 누구보다 그들의 아픈 마음을 잘 이해하는 동네 누나이기도 했다. 그리고 수학의 어려움을 극복해 대입에 성공한 멘토이기도 했다. 마음이 열리자 수학이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필요한 게 바로 '마법의 개념노트'. 머글을 순식간에 마법사로 만들어 주는 비법.


문제풀이에 지친 그들에게 개념은 새로운 마중물이 되었다. 그동안 머릿 속에 고여있던 단편적인 지식들이 굴비 엮이듯이 연결되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과 공부하면서 시냅스에 불이 번쩍이는 걸 느꼈고, 그 빛은 고스란히 눈빛으로 돌아왔다. 한 번 더 해보겠다는 의지로 나타났다. 


그들의 에너지는 내게도 큰 힘이 되었다. 고등학교 수학 뿐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경제경영 수학 수업도 듣고, 통계학 수업도 들었다. 학점은 중요하지 않았다.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이 어려워 죽을 것 같다가도 한 순간 깨달음이 오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전공 수업보다 열심히 공부했던 시간들. 아무도 내가 불어과인지 몰랐다. 


두 번째 학교를 다니면서 집안에서 핍박을 좀 받았다. (큰 딸이 대학을 십년 다니는 꼴을 봐주신 부모님께 감사한다.) 마음이 울적하면 개념노트를 펼쳐서 본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다 아는 손 때 묻은 노트. 샘이 알려주신 개념에, 내가 알게된 내용을 덧붙인 글씨를 조용히 만져본다. '그래, 그 어려운 수학도 했는데, 내가 못 할 게 뭐가 있어.' (못 할 게 있긴 있더라. 난 엄마한테 독립하는데 그 후로도 10년이 걸렸다.)


그때 만들었던 개념노트를 10년 넘게 소장하고 있었다. 신혼집까지 개념노트를 챙겨갔으니 할 말 다 한거다. 난 그렇게 수학과 사랑에 빠졌다. 내 책장 한 켠에 늘 자리잡고 있던 개념노트. 진짜 수학책들을 읽는 재미에 빠지다 보니 어느 샌가 잊어버렸다. 세 번째 이사간 집에서 문득 생각나서 책장을 찾아보니 없었다. 


아이를 키우며 더 눈뜨게 된 수학의 세계. 어린 아이들을 위한 수학공부를 하며 다른 노트를 만들어가고 있던 터라 아쉬움이 길게 가진 않았다. 개념은 6권의 노트덕에 내 머리속에 남아있으니까.


 

결혼 후 공부한 수학 노트들, 어린 아이들을 위한 수학이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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