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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인류연재 06화

에이미와 지금 나에게

by 준혜이

우리가 사귀기로 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영민이는 내가 좋아할 사람이라면서 대학동기를 소개해줬어. 에이미는 부모님이랑 한 집에서 같이 살다가 대학을 졸업한 다음 2살 차이 나는 친오빠와 차이나타운의 방 두 개짜리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5살 때 몬트리올로 이민 온 중국 여자애. 에이미는 대학을 다니는 내내 일주일에 한 번씩 영민이랑 한 팀에서 축구를 했대. 어색하게 띄엄띄엄 이어지는 대화에 지친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에이미 방으로 들어갔어. 내 허리 높이만 한 책장에는 영어로 번역된 요시모토 바나나, 무라카미 하루키 책들이 나란히 꽂혀 있었어. 이래서 영민이는 내가 에이미한테 반할 거라고 생각한 건가, 하게 만드는 책이 여럿 책장 안에 가지런히 자리하고 있었어. 한 손을 뻗어 손가락 끝으로 책 등을 스치듯 쓰다듬으며 책장 앞을 오락가락 산책하던 내게 에이미가 다가와, 나를 멈춰 세워, 키친을 꺼내 들더니 자신이 좋아하는 책이라고 나한테 빌려주고 싶다고 했어. 이미 한국어로 번역된 키친을 읽은 지 오래지만 영어로 번역된 키친은 또 다른 느낌일 수도 있을 것 같아, 나는 아무 말 없이 에이미 손에 들린 책을 건네받았어.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 책 표지를 뚫어져라 내려다보면서 한국어판 키친 표지가 어땠는지를 천천히 떠올려봤어.


에이미가 탄자니아로 떠나는 날, 나는 영민이 출장을 따라 핼리팩스로 떠나. 에이미는 응급실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탄자니아로 6개월짜리 파견 근무를 신청한 거야. 우리는 에이미가 출국하기 전에 함께 모여서 저녁을 먹었어. 그날은 아래층에 사는 에이미 남자 친구도 함께였는데 우리 대화에 남자들을 끼워줄 마음이 없었던 나는 피자를 먹는 중간중간, 맥주를 마시다 말다 하면서 에이미의 모험적인 인생이 부럽다고 말하고 또 말했어. 그런 내게 에이미는 진정한 모험의 시작은 정신으로부터라면서 소파 옆에 쌓여있던 책 몇 권을 집어 들어 내 가방 안에 넣어줬어. 내 가방 앞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에이미의 뒷모습에다 대고 영민이 일하러 가 있는 동안 호텔에서 혼자 읽으면 되겠네,라고 말하면서 평소처럼 속없이 웃고 싶진 않았어. 어떻게 해야 너처럼 살 수 있냐고 묻지 않아도 에이미가 그런 내 마음을 벌써 다 알고 있는 것만 같잖아.


영민이와 나는 2년간의 연애를 마치고 결혼식을 올린 사이. 친구들 중에 가장 먼저 하는 결혼이라 모두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우리를 축하해 주었지. 하지만 친구들은 우리에게 청첩장을 받는 순간 지금 자신 곁의 오래된 연인과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는 건 아닌가 고민했고, 상대방의 입에서 결혼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면 어쩌나 겁이 났다고도 해. 그런 애들에게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로 술에 취한 내가 떠들었어. 우리는 성격이 하도 급해서 빨리 결혼했으니까 이혼도 너네보다 먼저 하고 장례식도 1등으로 한다. 신랑 신부만큼이나 한껏 차려입었어도 우리와 달리, 이전과 다름없이, 연애만으로 자유로울 친구들에게서 멀리 벗어나고 싶은 심정으로 나는 그날의 주인공을 살았어. 이제 곧 캐나다 영주권자가 될 거야, 내가 두 팔을 번쩍 들고 외치려는 걸 눈치챈 건지 에이미가 피로연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어른들에게 허리 숙여 인사 중인 영민이를 불러다 내 옆에 끌어 앉혀놨어.


탄자니아에서 돌아온 에이미를 만나러 가는 날, 혹시 에이미가 레게머리를 하고 온 건 아닐까, 예전보다 까매진 얼굴로 나를 반갑게 맞아주겠지, 하고 기대했어. 하지만 에이미는 떠날 때와 별로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아파트 현관문을 열었어. 우리는 서로 한 번 꼭 끌어안고, 양 볼에 입을 맞추고 서로의 두 눈을 바라보았어. 긴 시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사람답게 에이미의 눈동자는 여기보다 더 먼 곳, 지금보다 더 겹겹인 나날을 향해 빛나고 있었어. 나와 영민 그리고 탄자니아에서 처음 만나 에이미와 함께 몬트리올로 돌아온 남자는 식탁에 둘러앉아 노트북을 열어놓고 에이미가 찍어온 수 백장의 사진을 같이 봤어. 에이미가 탄자니아에서 지내던 곳, 일하던 곳, 여행한 곳, 우리 안에 갇혀 있지 않은 동물들. 나는 이 모든 걸 직접 마주하듯이 온 마음을 다해 상상해 봤지만 가 본 적 없는 곳, 실제로 본 적 없는 풍경에 대한 갈망은 전혀 채워지지 않고. 투명한 바닷속 새파란 불가사리 사진을 보면서 내가 선택하지 않는 모든 것이 모조리 다 모여 이루어진 것 같은 에이미의 인생에 더 이상 침 흘리는 구경꾼이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어.


결혼한 지 2년 만에 우리 사이에 여자 아이가 태어났어. 우리가 집을 사고, 아이를 갖고 낳는 동안 에이미는 세 번 실연했고, 일하던 병원에 사표를 던진 뒤, 국경 없는 의사회에 들어갔어. 예멘으로 떠나기 전에 우리와 아이를 만날 수 있어 다행이라며 에이미가 우리 집에 찾아오기로 해. 에이미에게 현관문을 열어주고 남편이 아이방 흔들의자에 앉아 모유수유를 하고 있는 나에게 뛰어들어왔어. 에이미가 새 남자 친구를 데리고 왔는데 그 남자 흑인이니까 놀라지 말라고 우리만 알아듣는 한국말로 남편이 얘기해 줬어. 거실 소파에 앉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에이미와 그 남자 친구를 보면서 나는 에이미에게 돌려주지 않은 책의 제목을 하나 둘 떠올렸어. 에이미는 나한테서 아이를 기꺼이 받아 안고 이리저리 들여다보면서 아이의 맥박까지 세고 있었는데 그런 에이미가 엄마가 되는 걸 상상하긴 어려웠어. 에이미 옆에 꼭 붙어 앉아서 에이미 말고 그 누구에게도 관심 없다는 듯이 구는 저 남자를 두고 예멘으로 떠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예멘을 시작으로 의료 환경이 열악한 수많은 나라를 떠돌며 살게 될 에이미를 여자 친구로 두는 건 어떤 마음일까.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에이미가 고개를 들어 내게 말했어. 영민이가 아빠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에이미 엄마가 지금이 아이를 낳기에 얼마나 좋은 나이인 줄 아느냐고 자기한테 어찌나 잔소리를 퍼부었는지 모른다고. 나는 대답했어. 국경 없는 의사회라니 너의 용감하고 자유로운 인생이 부럽지만 내 딸이 너처럼 살겠다고 하면 난 그렇게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아. 에이미가 한숨을 쉬더니 품 안의 내 딸을 바라보면서, 그런 얘긴 이미 친척이나 친한 친구의 엄마에게 수도 없이 들었다고 했어. 온 세계를 돌아다니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면 크루즈 승무원이 되는 게 낫지 않겠냐는 누군가의 말에 에이미는 다른 사람들의 휴가를 위해서 일하고 싶지 않고, 그런 가짜 인생보다는 자신이 필요한 곳에서 진짜를 경험하면서 살고 싶다고 대답했다고 해. 자신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엄마가 불쌍하다는 말을 듣는 건 정말로 견디기 어려운 일이라면서 에이미는 지금 자신의 모습에 이민 1세대인 부모님 영향이 하나도 없었겠냐고 나에게 되묻고. 그 순간 오, 에이미. 여태껏 에이미에게서 한 시도 눈을 떼지 않으면서 에이미 허벅지를 계속해서 쓰다듬고 있던 남자가 에이미를 정신없이 불렀어.


에이미는 탄자니아에 가서 그랬던 것처럼 예멘에서도, 수단에서도, 요르단에서도, 레바논에서도 영민이 한테가 아닌 나에게로만 엽서를 보내왔어. 그 엽서들엔 탄자니아에서 온 것과 다른 점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에이미가 잘 지내라는 인사 대신 쓴 말이었어.

나는 곧 다른 곳으로 떠나, 그러니까 답장은 필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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