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미감(味感)

드레스덴, 2019년 8월 31일

by kay

와인을 잘 마시지 않는다는 A에게 설명했었다. 와인은 맛으로 마시기도 하고, 취하려고 마시기도 하지만, 한 병, 한 병에 새로운 이야기와 추억이 아로새겨지기에 마시는 것이라고... 그런 의미에서 프랑크푸르트에서 미리, 비스바덴에서 마실 와인을 한 병 사가지고 가자고 제안했다. 괴테하우스에서 멀지 않은 와인 가게 프랑크호프 미하엘 압트(Frankhof Michael Abt)에서 사장님 압트 씨가 골라준 트로켄베렌아우슬레제는 음악회가 끝나고 마시기에 적절한 선택 같았고, 우리는 그렇게 했다.



평소 와인을 즐기지 않는 A가 마시기에도 적당하게 단맛이 든 20년 묵은 포도주는, 비스바덴에서 들은 조성진의 피아노 연주와 연주회, 그리고 음악에 대해 논하는 우리의 대화에 깊이를 더해주었다. A가 자신의 아이폰 리스트 속 클래식 음악을 모아 배경음악을 깔아주었는데, 선곡이 꽤 좋았다. A의 귀는, 쇼팽 협주곡 1번, 2번을 실연으로 모두 듣고도 전혀 지치지 않은 모양이었다. 와인이 반 병쯤 사라지자, 음악을 전공하지 않았고, 음악 관련 일을 하고 있지 않은 A는 속상한 듯 마음 속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특히 음악을 전공한 사람들에게 조성진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하면, 고개를 갸웃하거나, 눈썹을 치켜올리거나, 어깨를 으쓱하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라고. 무시하는 것은 아닌데, 무언가 ‘음악을 사랑하는 나의 진심’을 폄훼하는 느낌이라고. “‘그냥 외모 보고 좋아하는 거 아니야?’라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고요.” ‘세상에는 참 바보같은 사람들이 많구나.’ 치즈의 향과 와인의 카라멜 향이 혀 안쪽에서 섞이는 걸 느끼면서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설득은 소용없을 거 같네요.” 나는 말했다. “마음대로 생각하라고 하세요, A님이 음악을 들으면서 기쁘면 됐죠. 그리고 오늘 연주자와 함께 사진까지 찍었잖아요. 좋은 날 이상한 사람들 생각하지 말구요.” ‘팬심’이라 표현하든 ‘덕질’이라 표현하든, 나는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인물이, 그리고 그 인물의 예술작품이 내 인생과 만나는 것 하나도 기적이고, 그 인물을, 또 그 인물의 예술작품을 내가 해독할 수 있다는 기쁨, 어딘가 교감하고 있다는 느낌은 쉽게 만나기 힘든 인생의 미감(味感)이다. 힘들게 만난 그런 인연을 어깨 으쓱 하면서 내려보는 사람은, 아는 건 많을지 몰라도, 어딘가 안쓰럽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가다보니, 비스바덴에서 드레스덴까지의 4시간 반의 기차 탑승 시간이 전혀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푸른 풀밭과 낮은 주택의 모습만 간간히 이어지는 독일 기찻길 풍경이 지루했다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 특별히 눈길 머물 곳 없이 푸른 초원을 바라보다가, 살짝 졸다가 하는 사이, 기차는 어느새 드레스덴에 도착했다.

왠지 좋아보이는 독일제jpg

드레스덴 노이슈타트(Dresden-Neustadt) 역 근처에 새로 지은 호텔을 잡았는데, 도착하고 보니 위치가 엄청 좋았다. 다리 하나만 건너면 츠빙어 궁전과 오페라하우스 젬페 오퍼가 바로 나오는 역 앞의 새 호텔인데, 반대쪽으로 걸으면 평화로운 주택가에 큰 수퍼마켓도 있어서, 그곳에 사는 사람들도 구경할 수 있었다. 저녁에는 어차피 공연 때문에 궁전과 오페라하우스가 있는 광장에 가야했기 때문에, 낮에는 수퍼마켓에 가서 동네 분위기를 보기로 결정, 생수도 살 겸 수퍼마켓에 걸어 가보았다. 한적한 주택가에 큰 수퍼마켓이 1층에도 있고 2층에도 있는 건물이었는데, 생각보다 굉장히 크고, 안에는 사고 싶은 물건들이 많았다. 대단한 건 아니지만 손톱깎이나 칫솔, 세제나 꿀 같은 것들이 의외로 굉장히 좋아보여서, 무거운 걸 짐에 보태지 않기 위해 큰 절제를 발휘해야만 했다. 독일을 자주 여행한 여행작가 B에게 이 사실을 카카오톡으로 알리자, ‘원래 그래요, 후후. 전 큰 트렁크 가져가서 가전제품까지 사오는 걸요’ 한다.


츠빙어 궁전의 문 4-3.JPG 츠빙어 궁전의 문


그리고 호텔을 중심으로 반대편으로 걸으면, 다리 하나를 건너 궁전으로 갈 수도 있다. 츠빙어 궁과 레지덴츠 궁, 그리고 젬페 오퍼가 한눈에 보이는 극장 광장은, 한 걸음만 들어서도 굉장히 다른 느낌을 주었다. 흔히 ‘유럽’이라고 하면 떠올릴 법한 조각, 첨탑, 광장, 정원, 분수 같은 것들이 쭉 이어져 있다보니, 다른 분위기의 새로운 공간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가운데 입구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쫙 대칭을 이루는 둥근 극장의 전면을 바라보니, ‘엘베강(江)의 피렌체’로 불렸다던 과거의 영광이 여전히 그 자리에 살아있는 듯했다. 한국에서 음악회를 예매할 때 함께 예매해 둔 극장 투어는, 극장 건축에 얽힌 뒷얘기들을 영어로 설명해주어 극장의 면면을 훨씬 친근감 있게 만들어 주었다. 츠빙어 궁전 정원의 한가운데에는, 1719년 츠빙어 궁에서 열린 결혼식을 270도 3D 애니메이션으로 재현해 상영하는 임시 돔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단돈 3유로에 디즈니 영화 속으로 잠시 들어간 듯한 재미있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극장 광장(Theaterplatz)  사진 5-3.jpg 고색창연한 드레스덴 극장광장


그러나 이 모든 우아하고, 고색창연하고, 무게감 있고, 아름다운 궁전과 성당과 정원과 오페라하우스는, 실로 엄청난 아픔을 겪어야 했다. 1945년 2월의 드레스덴 폭격으로 츠빙어 궁과 레지덴츠 궁, 젬페 오퍼 모두 큰 손상을 입었고, 복원에는 20년에서 40년이 소요되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아름다운 천장에 세익스피어 연극 속의 주인공들이 그려져 있고, 대리석처럼 보이지만 대리석은 아닌 녹색 기둥과, 1.9톤이라는 어마어마한 무게와 사이즈의 대형 샹들리에가 이곳을 빛내고 있다. 그러한 ‘재생’의 이미지는 폭격이 있기 전 마지막으로 공연되었던 칼 마리아 폰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가 1985년 복원 후 재개관 첫 공연으로 울려퍼진 것에서도 나타나는데, 오늘밤 이 역사적인 장소에서 나는 피아니스트 유자왕과 지휘자 정명훈, 그리고 드레스덴 국립관현악단,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가 선보이는 라흐마니노프를 만나게 될 것이다.



드레스덴 젬페 오퍼 극장 샹들리에 9-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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