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왕과 정명훈

드레스덴, 2019년 8월 31일 19시

by kay
사진2 7열 7번좌석에서 보이는 무대.JPG 여러분은 지금 독일 드레스덴 젬페 오퍼 7열 7번에 착석하셨습니다


“유자왕을 좋아합니까? 난 그녀의 열렬한 팬입니다. 오늘 연주회가 내가 본 여섯 번째 유자왕의 연주이지요. 이거 보세요. 여기 지난번 공연 표가 있지요? 여기 사인을 받았죠. 오늘도 사인을 받을 겁니다.”

드레스덴 극장 광장에 위치한 오페라 하우스 젬페오퍼(Semperoper)의 7열 7번에서 연주를 기다리고 있자니, 바로 왼쪽에 앉은 미시간에 살고 있다고 자기를 소개한 남성이 들뜬 목소리로 말을 걸어 왔다. 오늘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할 여성 피아니스트 유자왕의 열성적인 팬인 듯했다.

“그래요? 저는 음반으로만 듣고 연주는 오늘 처음 들어요. 여섯 번이나 들었다니 정말 대단하네요. 오늘의 지휘자 정명훈의 연주는 여러 번 들었지요. 인터뷰도 했고요.”

“인터뷰요? 대단한데요? 그는 한국 연주자죠? 당신은 미국에 삽니까?”

“아니요, 저는 서울에 살아요. 뉴욕에 산 적은 있어요.”

“음, 뉴욕. 저도 일 때문에 뉴욕에 자주 가곤 하지요. 오늘 연주회가 끝나면 내일은 벨기에로 갈 겁니다. F1 혹시 아나요? 자동차 경주요. F1을 보기로 되어 있지요! VIP라운지로요!”

연주회 직전의 설레는 기분!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입장하고 있어 박수를 치면서도 그의 자기 소개는 계속되었다. 희끗희끗도 아니고 완전히 백발인 노부부들이 거의 대부분의 좌석을 차지한 이곳 드레스덴에서, 이 활발한 목소리의 미국인은 흑발에 검은 눈인 나만큼이나 눈에 띄는 것 같았다.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에 나오는 표현 중에 “광부의 줄에 잘못 선 발레리나”라는 표현이 있었는데, 내 생각에 그곳 대부분의 관객들에게 우리 둘은 그 정도로 튀어 보였을지 모른다.

그럼 이 미국인이 이토록 추앙하는 유자왕, 그녀는 누구인가?



그녀는 1987년 베이징 태생으로, 여섯 살에 피아노를 시작했고, 중국의 각종 대회를 휩쓸다가 14살에 캐나다 음악학교로 유학을 갔고, 15세에 미국 커티스 음악원의 입학 허가를 받고 2008년 동 대학을 졸업했다. 그후 도이치 그라모폰과 장기(長期) 계약을 맺고 연 100회 이상의 연주회를 소화하며 위에 언급한 팬과 같은 다국적·다수의 팬을 거느린 화제의 연주자로 승승장구 하고 있다. 데뷔 초에는 지나치게 여성성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는 복장, 부상으로 인한 잦은 연주 취소로 이슈가 되기도 했는데, 현재까지 이어온 꾸준한 실력으로 많은 부분, 논란을 잠재운 피아니스트이기도 하다.

라고 생각했지만.

우리의 자랑스러운 마에스트로 정명훈과 함께 무대로 걸어나온 유자왕은 여전히 엄청나게 달라붙고 엄청나게 반짝거리는 짙은 분홍색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내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다음으로 좋아하는 3번을 연주하기 직전이었는데, 박수를 치면서도 한편으로 ‘저렇게 타이트한 드레스를 입고 연주가 가능할까? 연주에 방해되진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이 무색하게도.

유자왕은 아무렇지도 않게 테크닉이 어렵기로 유명한 라흐마니노프 협주곡을 연주해나갔다. 드레스가 딱 붙든, 라흐마니노프든, 함께 연주하는 오케스트라가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든, 객석이 기대치를 한껏 높인 유럽의 백전노장(?) 관객들이든, 별로 개의(介意)하는 것 같지 않았다. 같은 중국 출신의 피아니스트이지만 랑랑이 뜨거운 감정의 소용돌이로 듣는 이들을 몰아간다면, 유자왕은 시원한 레모네이드에 가깝다는 느낌이었다. 레모네이드를 마시면서 불안에 떠는 사람이 없듯이, 우리는 그저 쭉 들이키면 되는 것이었다. 걱정은 붙들어매고!



45분에서 50분에 이르는 긴 러닝타임의 곡이지만, 유자왕이 무념무상의 경지로 연주하니 1악장도 2악장도 그렇게 짧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3악장이 되니 ‘벌써 끝나나...’ 서운한 느낌이 들 정도로 시간은 금새 지나갔다. 그다지 움직임이 많지도 않았다. 작은 체구의 골퍼가 가볍게 친 공이 놀랍게 멀리 나가듯이, 유자왕의 사운드는 컸지만, 그 얼굴이나 손에는 힘을 주는 기색이 없었다. 감정의 몰아침을 느낄 수는 없었지만, 놀라운 기교와 압도적인 몰입감을 선사했다. 대곡을 끝내고 힘들기도 하련만, 피아노에서 가뿐히 일어난 연주자는 좁은 드레스 폭 안에서 바쁘게 발목을 움직여서 오케스트라 단원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공연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은 그녀의 연주에 감탄하며 큰 박수를 보냈고, 객석 앞쪽에 앉은 관객들은 힘차게 발을 구르며 박수를 쳤다. 큰 공연장의 바닥이 울리는 쿵쾅쿵쾅 소리가, 안 그래도 큰 박수소리를 더욱 극적으로 만들었다. 두 번째 인사를 하러 나왔다 돌아선 유자왕은 아무래도 드레스 자락이 답답했던지 무릎에서 치마를 확 잡아올려 기어코 롱드레스를 미니로 만들었고, 슬쩍 비친 검은 속치마와 함께 편안하게 퇴장했다. 그 순간 더욱 큰 환호가 쏟아진 건 이 저녁 그녀의 마법에 빠져든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사진3-1 연주후 인사하는 유자왕.jpg 미니로 만들기 직전!


1부가 끝나고 웅성거리며 좌석에서 빠져나간 사람들은 로비에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거나 음료를 사기 위해 줄을 늘어섰다. 나도 와인을 한잔 들고 1층 바깥으로 저녁바람을 쐬러 나갔다. 바깥으로 나갈 때에는 웨이터들이 카드를 한 장씩 나눠 주었다. 재입장을 위한 카드였다. 뉴욕에서도 늘 비슷했지만, 커플들은 격식을 갖춘 칵테일 드레스와 정장을 입고 좋은 모습만 보여주는 데이트 놀이를 하고 있었다. 서양인들이 참 좋아하는 놀이... 뉴욕과 조금 다른 점은 아주 나이가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 커플이 꽤 많다는 점이었다. 정성들여 꾸미고 나와 완성도 높은 연주를 들으며 가을날을 즐기는 하루는, 나에게나 그들에게나 기억에 남는 소중한 하루이겠지.


사진4 인터미션후 재입장 가능 카드.JPG 연주홀 재입장 카드와 와인


2부의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와 정명훈의 브람스 교향곡 2번도 굉장히 좋았고, 반응도 뜨거웠다. 호응에 힘입어 마에스트로 정은 특유의 바퀴돌리는 제스추어와 함께 브람스 헝가리 무곡을 앙코르로 연주했다. 도쿄에서 도쿄오케스트라와 산토리홀에서 연주하는 정명훈을 보았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지만, 해외의 오케스트라가 연주회에서 눈빛으로 보여주는 지휘자 정명훈을 향한 신뢰는, 항상 감탄스럽다. 관객이 박수로 표현하는 애정은 말할 것도 없고... 국보(國寶)라는 표현이 과장없이 어울리는, 언제나 자랑스러운 한국의 예술가다. 이렇게 좋은 마음으로 드레스덴의 밤을 누릴 수 있게 해준 모든 상황에 감사하며, Taschenbergpalais 호텔의 Karl May Bar에 들렀다. 론리플래닛 추천은 믿을만했으며, 가볼만했지만, 내 입맛에는 칵테일보다는 간단한 식사 메뉴에 있는 감자수프가 정말 맛있었다. 연주는 안했지만 어쩐지 연주 후에 생겨버린 멜랑콜리를 감싸주는 따뜻한 수프였다. 누가 뭐라해도, 독일의 감자는 정말 맛있다.

독일의 감자는 정말 맛있어


사진8 극장광장에서 탱고를 추는 커플.jpg 늦은 밤 극장 광장에서 탱고를 추는 연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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