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센바흐의 Very Beginning

콘체르트하우스 베를린, 2019년 9월 1일 13시

by kay

13박 15일간 독일의 6도시(프랑크푸르트, 비스바덴, 드레스덴, 베를린, 라이프치히, 크론베르크)를 여행하면서, 독일에 in, out할 때만 빼고는 모두 기차를 이용했다. 독일이 기차의 나라라서 기차로 여행하기 좋은 나라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한국에서 기차를 예약하기도 생각보다 수월했고(‘thetrainline.com’ 사이트를 이용하면 시간대도 한눈에 볼 수 있고, e티켓도 이메일로 보내준다) 여러 시간대 중에 오전에 한 번, 오후에 두 번 정도 확 저렴한 타이밍이 있어서, 스케줄과 맞을 경우에는 그런 시간의 표를 샀다. 드레스덴에서 베를린으로 가는 기차표의 경우에는 2등석과 1등석의 표가 2유로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 1등석을 샀는데, 아주 조용하고 기분 좋게 갈 수 있었다. 주위에 승객이 없으니 여러 장의 셀피(selfie)를 찍을 때에도, 조용히 보고싶은 친구에게 편지를 쓸 때에도 마음이 편했다.


오전 8시 46분에 드레스덴을 출발해 2시간 만에 베를린에 도착했다. 베를린에서 보려고 마음먹은 첫 연주회는 지휘자 크리스토프 에센바흐(Christoph Eschenbach)의 오픈 리허설이었다. 한국에서 음악회 스케줄을 검색할 때, 나의 방문 예정 기간에 평소 좋아하던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 에센바흐의 공연이 떠서 너무나 기뻤는데, 한 가지 애매한 점이 있었다. 에센바흐 공연에 링크된 어떤 사이트에서 리허설을 관람하는 티켓 값으로 10유로를 결제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연이 열리는 콘체르트하우스(Konzerthaus Berlin)의 공식 홈페이지에는 독일어로 무료라고 써 있는 것 같았다. 약간의 리스크가 있었지만 표를 결제하지 않고, 직접 공연장으로 가보았다. 공연장에 도착해서 프로그램북을 나누어주고 있는 직원에게 물어보니 역시나 오픈 리허설은 무료였고, 좌석은 전부 선착순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정식 공연이 아니고 리허설을 공짜로 구경하는 컨셉트이다보니, 나를 포함해 모든 관객은 캐주얼한 차림으로 편안하게 왔다. 심지어 두 살배기, 세 살배기를 안고 와서 서서 지켜보는 부모들도 있었다.

아이를 안고, 서서, 혹은 앉아서 자유롭게 구경한다

프로그램북을 자세히 보니 내가 한국에서 검색했던 오후 1시의 오픈 리허설 뿐 아니라, 오후 2시에는 실내악 공연, 4시에는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신세계로부터>까지, 하루 종일 무료 공연이 이어지는 콘체르트하우스 베를린의 ‘웰컴 데이’였다.

운 좋게 앞에서 세 번째 줄에 앉게 되어 기쁜 마음으로 리허설을 기다렸다. 한국의 공연장들에 비하면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자리가 굉장히 객석 쪽에 붙은 모양새였다. 조금 과장해, 조금 움직임이 과하면 객석으로 나동그라질 것 같은 느낌? 하지만 그만큼 연주자들이 ‘나와 가까운 존재’라는 느낌도 있었다. 이렇게 가까운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자리 중에서도 무대 맨 앞에 놓인 지휘대에, 나의 ‘최애(最愛)’ 지휘자 중 한 명인 에센바흐가 나왔다. 평생 왕성한 연주활동을 하며 수많은 명반(名盤)을 남긴 이 분도 이제는 79세! 사회자와 함께 나와 인삿말과 10분 정도의 인터뷰까지 했는데, 모든 내용은 독일어로만 진행되었다. 영어와 겹치는 발음이 별로 없는 단어들의 연속이라, 내용은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무튼 날씨 좋은 일요일에 ‘공짜 음악회’를 보러 온 관객들에게 적합한, 매우 친절한 형식의 음악회였다. 곡 전체를 연주하는 공연이 아닌 만큼, 몇몇 관객은 문간에 서있다 나갔다 들어오기도 하는 등 시종일관 편안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고, 일단 리허설이 시작되자 지휘자 에센바흐는 관객을 별로 의식하지 않은 채, (내 느낌에는) 평소와 다름없이 오케스트라 연습과 리허설에 집중했다.

(사진4) 사회자와 인터뷰 중인 크리스토프 에센바흐.jpg 콘체르트하우스에서 오픈리허설을 진행하는 지휘자 크리스토프 에센바흐(Christoph Eschenbach)

이날 리허설을 보면서 내가 느낀 점은 이렇다. ‘지구의 모든 오케스트라 리허설은 결국 이 한마디로 귀결된다.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 내가 초등학교를 갓 졸업해 열두 살에 서울 중구 정동길의 작은 학교 ‘예원학교’에서 처음 ‘오케스트라’라는 것의 연습에 참여해서 했었던 모든 일과, 2019년 오늘 독일 베를린에서 만난 콘체르트하우스 베를린의 단원들이 하는 모든 일은 기본적으로 같다. 수십의 연주자가 쭈루룩 줄을 맞춰 앉아 지휘자를 기다린다. 지휘자는 이 천방지축의 개성 강한 연주자들을 한데 모아 한 음 한 음 훈련을 시킨다. 오케스트라 연습을 하면 ‘very beginning’이라는 표현을 매일 듣게 되는데, ‘맨 처음부터’라는 뜻이다. 맨 처음부터, 맨 처음부터, 다시! 다시! 그 외에도 한 페이지에 한 두 개씩 규칙적으로 놓인 ‘A’부터 ‘Z’까지의 마디 수에 맞춰서 연습하고, 또 연습한다. 손에 익고, 귀에 익고, 머리에 익을 때까지. 그리고 지휘자는 거기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최대한 많은 사람이, 최대한 한 마음이 되도록. 지휘자의 지휘봉은 때론 메트로놈이 되어, 때론 마음을 후려치는 회초리가 되어 한 명 한 명을 조련한다. 그리고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라고 말하고 싶어질 때 쯤, 저 멀리서 한 줄기 청량한 빗소리가 들려오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객석의 박수소리...


그렇게 나에게는 특별할 것 없는, 그러나 대부분의 관객에게는 생소한 모습일 오케스트라 리허설이 끝나고 난 후, 파란 하늘이 기다리고 있는 콘체르트하우스 건물 앞으로 나섰다. 콘체르트하우스의 정 가운데로 난 계단 위에서는 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브라스 밴드가 주말에 어울리는 흥겨운 곡들을 연주하고 있었고, 그 아래 베를린 사람들이 천천히 걷거나 자전거를 타며 여유롭게 한낮을 즐기고 있는 모습들이 보였다. ‘이런 날엔 피자지’! 마침 콘체르트하우스 바로 길 건너편에, 야외에 흰 천으로 감싼 테이블을 내놓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보였다. 리허설을 끝낸 에센바흐가 맥주 한 잔 하러 들를 것만 같은 곳이었다. 에센바흐가 오지는 않았지만 도이치 돔과 프렌치 돔 사이에서 햇살을 즐기며 마시는 크롬바허(Krombacher) 맥주는 꽤 그럴듯했다. 이제 다시 포멀한 옷으로 갈아입고, 그 유명한 공연장, 베를린 필하모니 홀(Berliner Philharmonie)로 가야한다.


콘체르트 하우스와 프렌치 돔을 바라보며 피자를 먹었다 1.JPG 청명한 날의 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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