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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y Nov 18. 2020

3300년 전 미인, 네페르티티

베를린, 2019년 9월 3일


3300년 전 미인은 어떤 모습일까?


그 해답을 알 수 있는 흉상은 다른 곳 아닌 베를린에 있다. ‘박물관 섬’이라는 뜻의 ‘뮤제움스인젤(Museumsinsel)’은 베를린 여행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미술 작품과 건축물이 5개 박물관에 걸쳐 있는, 볼거리가 가득한 보물 창고다. 3300년 전 미인으로 알려져 있는 네페르티티(Neferttiti) 흉상은 다섯 개 박물관 중에서도 ‘신 박물관(Neues Museum)’에 위치해 있다. 여행 안내서 ‘론리 플래닛’에서 뮤제움스인젤에서 가장 강력하게 추천하는 작품 중 하나인 네페르티티의 얼굴은, 과연 멀리까지 찾아가서 구경할 만큼 신비로웠다. 역시 3000년 전에 만들어진 ‘황금 모자’와 함께 박물관의 대표 전시품 중 하나인 만큼, 삼엄한 경비가 이뤄지고 있었고, 사진 촬영도 금지되어 있었다. 우리가 흔히 ‘얼굴이 조막만하다’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 여인의 형상이 바로 그랬다. 물론 실제 얼굴 사이즈는 아니고 조금 축소된 형태라서 그렇긴 한데, 느낌은 현대의 미인형 얼굴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여인이 쓰고 있는 왕관이라든지 장식품도 굉장히 멋졌다.


3300년 전의 미인, 네페르티티(Neferttiti) 흉상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Nefertiti_berlin.jpg#/media/File:Nefertiti_berlin.jpg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여왕 네페르티티는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 아케나텐(Akhenaten)의 부인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기원전 1370년에서 1340년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적인 인물인 만큼 수많은 네페르티티 조각 작품들이 있는데, 베를린 신 박물관의 네페르티티 흉상은 기원전 1345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독일의 고고학자 루드비히 보르카르트(Ludwig Borchardt)는 1912년 12월 6일 이 흉상을 발견했는데, 그는 다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우리는 가장 생명에 차 있는 이집트의 예술작품을 찾아냈다. 우리는 그것을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 당신은 그 실물을 보아야만 한다.”




다섯 개 박물관의 수많은 전시관을 다 볼 생각은 없었기에, 추천 전시품인 ‘네페르티티’와 ‘황금 모자’만을 보고, 그리로 가는 도중에 보게 되는 작품들만 훑어보았는데, 그렇게만 해도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네페르티티의 조각은 지금 생각해봐도 특별한 감흥이 있는 조각상이고(그렇게나 오래되었다는 역사적인 배경도 놀랍지만, 단순히 미술 작품으로만 보아도 정말 특이하고 아름답다) 황금 모자는 그 옛날 권력자임을 나타내기 위한 모자였다는 사실에서(모자의 높이가 75cm나 되고, 표면에는 농사를 위한 달력이 꼼꼼하게 새겨져 있다)

황금모자, 농사를 위한 달력이 꼼꼼하게 새겨져 있다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Berliner_Goldhut2.jpg#/media/File:Berliner_Goldhut2.jpg ‘권력’과 ‘권력을 상징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물건들’에 대해서 사색하게 하는 심오한 공예품이지만, 큰 박물관 속의 너무나 많은 물건들은 가끔 여행자를 지치게 한다. 그곳에 살면서 천천히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지만, 만약 살게 된다면 늘 볼 수 있다는 이유로 또 관람은 하염없이 미뤄지겠지. 그런 거다.  

베를린에서 삼천 년 전 미녀 네페르티티의 얼굴이 나를 사로잡았다면, 건축물 중에서도 한 건물이 내 가슴 속으로 들어왔다. 처음 마주한 순간 가슴이 찡하고 눈물이 핑 돌았는데, 건물을 보고 그런 식으로 반응했던 건 살면서 처음이었다. 바로 카이저-빌헬름 추모 교회(Kaiser-Wilhelm-Gedächtniskirche)였다. 아무 생각 없이 동네 카페에서 포근한 카페라테를 마시고 나온 길이었는데, 저 길 끝에 나무에 가려진 교회 건물이 하나 보였다. ‘뭔가 이상한데?’ 하고 다시 보니 교회의 한 끝이 무너져 있었다. 그 때에서야 느낌이 왔다. “아, 폭격의 상처를 그냥 둔 거구나...!”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참혹한 모습에 마음이 떨렸다. ‘그 건물은 2차 대전 중 폭격을 당해 파괴되었습니다’라고 말하면 ‘그런가보다’하지만, 그 모습이 눈앞에 보일 때에는 마음에 충격이 왔다. 아주 가까이 가보니 불탄 흔적과 1층에 유리가 없이 뻥 뚫린 창문 구멍도 그대로였다. 물론 완전히 그대로는 아니고, 안전과 관람을 위한 보수 후의 모습이기는 하지만, 이 모습만으로도 건물이 하고자하는 말이 충분히 전해져왔다. 전쟁은 너무나 아픈 것이고, 무서운 것이라는 말이...

카이저-빌헬름 추모 교회


물론 2차 대전을 ‘일으킨’ 국가 독일의 반전 메시지는, 피해 국가의 그것에 비해서 호소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교회 안에 놓인 여러 가지 전시품들이나 “이 교회를 보고 전쟁의 비극을 깨달음과 동시에, 독일에 있는 친구들의 아픔도 이해하게 됐다”는 둥 하는 편지들도,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일본의 반전 운동과도 겹쳐지며 그 진의를 의심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한때 흠 없이 아름다웠을 이 교회가 불타고 무너졌을 때의 상황을 상상해보게끔 하고, 또 그러한 ‘불완전한’ 인간을 신이라는 존재 앞에서 되돌아보게 하는 힘은, 분명 이 교회에 있었다. 그런 속상한 마음으로 교회 안의 초를 사서 불을 붙이고 나오니, 바로 앞의 ‘신관’ 건물 앞에 다음날 저녁 바로 이 교회 안에서 열릴 음악회의 표를 파는 임시 부스가 차려져 있었다. 

신관 안으로 들어가보니 그곳은 온통 푸른색으로 된 스테인드글라스에, 엄청나게 큰 예수상, 그리고 5000개의 파이프가 있는 카를 슈케(Karl Schuke)의 오르간이 설치된 모던한 스타일의 예배당이었다. 이곳에서 나를 위해 베를린 오케스트라의 멤버들과 오르가니스트 지오르고스 프라고스(Giorgos Fragos)가 비발디와 모차르트를 연주해준다면, 딱히 가지 않을 이유는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고, 오르간 소리도 홀을 잘 돌아나와 잘 들릴 것 같은 자리로, 내 좌석을 ‘찜’했다.     


카이저-빌헬름 추모 교회(Kaiser-Wilhelm-Gedächtniskirche) '신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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