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2019년 9월 1일
독일을 여행하면서 내가 외로웠던가?
프랑크푸르트에 지인이 한 명 살고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이번 여행은 ‘혼행’, 혼자 하는 여행이었다. 대학교 때, 영국 런던에서 6주 어학 코스를 끝내고 나서, 벨기에 브뤼셀과 룩셈부르크, 독일 슈투트가르트를 도는 뜬금없는 코스의 혼자 여행을 한 적이 있다. 이때 '혼행’에 대한 환상이 완전히 깨졌다. 무엇을 봐도, “어머, 예쁘다!”, “어머, 재미있다!”라고 말할 사람이 옆에 없다는 게 불행했다. 그럼에도 부지런히 포르셰 뮤지움도 가서 ‘올드 포르셰’도 구경하고(이건 여전히 추천코스다), 슈투트가르트 발레도 구경하고, 어디선가는 동물원도 갔었다. 그리고 그때도, 부지런히 사진을 찍었다.
누군가 이번 여행도 별로였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답할 것 같다. 예전의 나는 물론 더 에너지가 넘치고, 다른 장점도 있는 나였겠지만, 나 자신과 친구가 되는 법을 몰랐던 것 같다. 나에게 거의 시선을 두지 않았다고 할까? 주변 사람들의 기분과 모드를 너무 살폈던 것 같고, 그리고 그들의 기분이 곧 내 기분이라고 믿어버렸던 것 같다. 내 옆의 친구가 웃고 있으면 나도 기분이 좋은 것이고, 친구가 스트레스 받으면 나도 스트레스 받는다는 식으로... 옆 사람에게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때 '내 기분'은 내 안중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홀로 베를린에 도착했지만, 괜찮았다. 배고프면 먹고, 배 안 고프면 안 먹고, 컨디션 좋으면 걷고, 나쁘면 눕고, 나 자신에 충실했고, 보고 싶은 음악회는 몰아서 다 봤다. 동행이 있었다면 어쩌면 짜증냈을 수도 있는, 낮 2시 콘체르트 하우스 베를린 공연 관람, 같은 날 저녁 6시 베를린 필하모니 홀 콘서트 오페라 관람도 문제없었다. 낮엔 지휘자 크리스토프 에센바흐와의 만남, 밤엔 지휘자 블라디미르 유롭스키(Vladimir Jurowski)와의 만남이었다. 유롭스키는 KBS 클래식 FM 라디오에서 잠시 PD로 일할 때, 여러 곡들을 들어보면서 알게 된 지휘자인데, 좋은 녹음이 많았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그림자 없는 여인(Die Frau ohne Schatten)’을 블라디미르 유롭스키 지휘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오페라 내용도, 가수도, 오케스트라도 그다지 따지지 않고 예매해버린 것이었다. ‘믿고 듣는 유롭스키’, 그런 심정으로...
결론부터 말하면, 유롭스키는 믿어도 되는 지휘자였다. 오페라를 보기 전, 급하게 인터넷으로 대강의 내용만 훑고 들어갔는데, 콘서트 오페라다보니 의상도 없고 무대도 없어서 처음엔 엄청 혼란스러웠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후 역의 안네 슈바네빌름스(Anne Schwanewilms)와 유모 역의 일디코 코믈로시(Ildikó Komlósi)는 엄청난 공력을 보여주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슈바네빌름스는 67년생, 코믈로시는 59년생으로 꽤 나이가 많았지만, 큰 베를린 필하모니 홀(2450석)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소리에 힘이 있었다. 바그너, 베르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뛰어난 해석자로 알려져 있는 슈바네빌름스는 (자막이 없어 정확한 내용은 캐치할 수 없었지만) 드라마와 감정 연기가 훌륭한 것 같았고, 모차르트 <코지 판 투테>의 도라벨라, 비제 <카르멘>의 카르멘, 바르토크 <푸른 수염 영주의 성>의 유디트까지 종횡무진 활약하는 코믈로시는 예순의 나이가 믿기지 않
는, 홀 천정을 뚫고 나갈 듯한 음성의 박력(迫力)을 보여주었다. 황제 역에는 토르스텐 케를(Torsten Kerl), 영혼의 사자 역에는 일본인 바리톤 히라노 야스시(平野 和)가 활약했지만, 이날의 화려함은 (대본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슈바네빌름스, 코믈로시 두 여인의 몫이었고 박수도 이들 둘에게 집중적으로 쏟아졌다. 신전 문지기 역의 안드레이 넴저(Andrey Nemzer)는 2013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데뷔를 이 역으로 한 만큼, 등장시간은 두 여인에 비해 길지 않지만 카운터테너의 매력을 십분 펼쳐보였다.
6시에 시작해 두 번의 20분 휴식시간이 있고, 10시 30분에야 끝나는 대장정이어서, 중간 중간 나의 집중력이 흐트러졌지만, ‘연주를 잘하면 어려운 작품도 듣기 좋다’는 나의 지론이 확실히 증명되는 공연이기도 했다.
모든 배역에 대한 베를린 방송교향악단(Rundfunk Sinfonieorchester Berlin, RSB)의 민첩한 대응은, 이 복잡하고 난해한 화성도 오케스트라 전체가 잘 이해하고 연주하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공연의 끝부분에 가서는 단원들이 조금 힘들어 보이기는 했지만, 텐션을 잃지는 않았다. 이 역시도 나중에 프로그램북을 한 번 더 보고 안 사실인데, 이 공연은 UKW 89.6MHz로 일주일 후 방송되는 공연이었다. 중간 중간, 중창단이 2층 객석에서 노래하고는 했는데, 녹음은 잘 됐으려나, 혼자 걱정도 되었다.
베를린 필하모니 홀은, 음... 소위 빈야드 스타일의 선구(先驅)인 건축가 한스 샤룬(Hans Scharoun)을 비판할 생각은 없고, 비판할 자격도 없지만, 내가 최고로 좋아하는 건축물 느낌은 아니었다. (너무 영어식 표현인가?) 공연장 안으로 들어서면 물론 굉장하고, 아름답고, 음향도 좋고 해서 성악가들 소리도
빠짐없이 잘 들렸지만, 내가 음악회장 안의 상황만큼 중시하는 입구라든가 로비는, 무언가 산만하고 동떨어져 보였다. 이건 건축이 아니고 인테리어의 문제일 수도 있는데, 안의 불근불긋한 조명이라든지 불규칙한 기둥은 어쩐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데가 있었다. 이런 것은 물론 취향의 문제니까, 나 혼자만의 생각임을 분명히 해두겠다. 입구 부분을 빼고 홀 전체를 외부에서 보면, 오각형의 밝은 나무 색 같은 노란빛이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