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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솔지책 Feb 01. 2022

끊으라고? 너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황홀하고 비참한 중독과 괴롭지만 희망찬 회복의 이야기


최근 몇 달간 가장 좋았던 책, 《리커버링》을 소개해보려 합니다.
저는 정말 좋았는데 1) 분량 압박이 있는 점 2) 중복과 회독에 관한 이야기라 내용이 무거울 수 있다는 점 등 때문에 호불호가 꽤 갈리는 것 같아요.



레슬리 제이미슨 지음, 오숙은 옮김, 《리커버링》(문학과지성사, 2021)


레슬리 제이미슨. 그의 얼굴을 보고 나니 이 책이 더 절박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왤까요..

레슬리 제이미슨

— 이 책을 쓴 레슬리 제이미슨은 작가 지망생이었습니다. 작가로 데뷔하기 이전부터 술을 마셨고 어느새 알코올중독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술을 병째 들이붓고 마시지 못하면 초조해서 돌아버리죠.

— 독자가 보기에 그는 일종의 애정 결핍도 있고 끊임없이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해요. 확인을 받기 위해 문제를 일으키는 식이랄까요(하지만 이건 알코올중독자의 문제라기보다는 많은 사람이 고치고 싶어 하는 어떤 특성이 아닐까 싶어요). 레슬리 제이미슨은 이 책에 알코올과 사랑이 결합된 아주 지독히 도수 높은 글을 내놓습니다.


폰트가 아주 맘에 드는 표지...

우리는 왜 중독되는가

— 이 책을 읽는 내내 들었던 생각은 '왜 중독되는 걸까'였어요. 사실 알코올뿐만 아니라 저희는 많은 것에 중독되어 살아가잖아요. 알코올과 약물이 극단적인 형태의 중독이라면 카페인, 일, 사랑도 중독의 한 형태일 수 있겠죠. 

— 그럼 대체 왜 우리는 중독되지 않고 살지 못하는 걸까요? 사람마다 답은 다르겠지만, 레슬리 제이미슨은 자신의 음주 상태를 이렇게 표현하더라고요.

음주는 제약의 반대말처럼 느껴졌다. 음주는 자유였다. 음주는 자유를 거부하기보다는 원하는 욕구에 굴복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탐닉이었다.

— 많은 것에 제약되어 살다 보니 결국 뭔가에 중독되는 게 아닐까 싶었어요. 사는 게 힘들고 팍팍하다고 느낄수록 나에게 '자유'를 준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깊게 탐닉해가는 거죠. 저 역시 심각한 카페인 중독인데 생각해보면 맛있는 커피(도 중요하지만) 그 자체보다는 커피를 마시는 시간에 큰 의미를 두는 것 같아요. 커피를 홀짝이는 그 시간만큼은 많은 투두리스트와 제약에서 벗어난다고 느끼는 거죠.



예술가들의 중독

— 레슬리 제이미슨은 이 책에서 자신의 중독만 쓰는 것이 아니라, 많은 예술가의 중독에 대해서도 다룹니다.

— 전 어렸을 때부터 예술가라면 뭔가 늘 만취해 있고 제정신이 아닐 거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는데요, 그건 영미권 영화와 책에서 큰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실제로 많은 예술가가 알코올 혹은 약물중독으로 살았고 정말 지독히도 앓던 삶을 살았죠. 어찌나 그런 사람이 많은지, 심지어 누군가는 이런 표현까지 씁니다.

1996년에 한 젊은 작가가 존슨에게 편지를 썼다. “제가 저의 알코올중독을 이해하게 도움을 준 당신의 한결같은 지원과 우정에 감사를 드립니다. 미국 작가에는 술을 마시는 작가, 그리고 과거에 술을 마셨던 작가 두 부류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저를 후자로 이끌어주셨습니다. 형제여, 고마워요.”


AA 모임

— 많은 미국 작가가 중독자로서의 삶을 살았고(지금은 좀 다르려나요?) 그들은 대개 '익명의 알코올중독자(Alcoholics Anonymous, AA)' 모임(이번에 알았는데 AA 한국연합이 있네요)에 참여합니다. 이 모임에 참여하면 다른 중독자들과 둥글게 모여앉아 자신의 증상을 공유해야 해요. 어디까지 미쳐 있었는지를 남들 앞에서 털어놓게 되는 겁니다.

— 이 모임의 중요한 기능은 자신의 증상을 받아들이는 것, 우리의 이야기가 "십중팔구 아주 평범하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 이런 고통을 겪는 타인들이 있다는 것, 그들과 함께할 가능성을 열어둘 수 있다는 것 등이에요.

사람들이 주먹으로 얼굴을 맞은 이유는 저마다 달랐지만, 음주는 우리 모두의 몸을 공격받기 쉽게 만들었다. 우리는 완벽히 똑같은 척하기 위해, 그것을 주장하기 위해 거기 모인 게 아니었다. 우리가 거기 모인 건 함께한다는 가능성에 우리 마음을 열기 위해서였다.


— 저는 AA 모임의 기능이 레슬리 제이미슨이 말한 대로 다른 것에 관심을 기울이게 한다고도 생각했어요. 나의 관심이 오로지 술에만 집중되어 있지 않게 만드는 거죠.

— 전에 읽었던 어떤 책에서도 알코올중독자가 자신의 버디(AA 모임에서는 술을 끊은 지 좀 더 오래된 다른 사람을 한 명씩 붙여주더라고요. 일종의 멘토랄까요)에게 전화를 걸어 "술이 너무 마시고 싶어요. 어떡하죠?"라고 물었는데요, 그 버디가 "침대 정리 했나요? 안 했으면 일단 하세요"라고 하더라고요. 그러고 또 전화를 하면 설거지는요? 청소는요? 강아지 밥은요? 라는 식으로 계속 다른 일을 하게 만들어요.

어쩌면 술을 끊는다는 건 자기성찰과 관계있는 게 아니라 술이 아닌 나머지 모든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과 관계가 있는 것 같았다.



악당으로서의 중독자

— 제가 이 책을 좋아했던 또 다른 이유는 이 책이 미국의 시스템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기 때문이에요. 중독자를 악당으로 취급하며 그들을 그저 세상에서 몰아내려는 시스템과 사람들의 인식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 게다가 미국은 '마약중독자들은 곧 흑인'이라는 고정관념을 만들어내기도 했어요(어쩌면 여러분도 마약 중독자 하는 순간 흑인을 떠올리지 않았을까요?). "1995년의 한 조사는 참가자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잠시 눈을 감고 마약 사용자를 떠올려보시고, 그 사람에 관해 설명해주시겠습니까?” 미국의 마약 사용자 가운데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15퍼센트에 지나지 않음에도, 응답자의 95퍼센트가 흑인을 떠올렸다. 이 가상의 마약 사용자는 수십 년간 이어져온 효과적 스토리텔링의 산물이었다."

— 레슬리 제이미슨은 "모든 중독 이야기는 악당을 원한다"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이미 중독되어버린 사람이라면 그들을 악당으로 취급하고 처벌하는 게 아니라, 치료받아야 환자로 보고 치유를 돕는 게 사회가 해야 할 가장 최선의 역할 아닐까요? 레슬리 제이미슨이 쓴 것처럼요.

그것은 단지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중독자들을 악당으로—이 경우에는 범죄자를 악당으로—여기고 처벌만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건 단지 동정심의 문제가 아니라 실용주의의 문제다. 사람들이 호전되게 하려면 무엇이 도움이 될까? 그것은 우리 시각을 조정하는 문제다. 감옥에 다녀온 후 지금은 형법 개혁가로 일하는 조니 페레스Johnny Perez는 그 문제를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사람을 사람으로 본다면, 사람을 사람으로서 대할 것입니다. 이상입니다.”

— 사실 우리나라는 알코올중독이나 약물중독이 전면에 드러나지도 않지만 마약범죄가 급증하고 있듯, 갈수록 더 많은 사람이 손쉽게 중독의 길로 들어서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 됩니다. 우리나라에도 미국의 치료사법 같은 제도가 꼭 생기면 좋겠어요.



마음을 뚫어버린 문장들

— 호불호는 갈릴 수 있는 책이지만 이 책을 읽은 사람 거의 대부분이 '레슬리 제이미슨은 글을 기가 막히게 잘 쓴다'는 명제에는 동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최근 몇 달간 읽은 책 중 가장 많은 인덱스를 붙인 책이었거든요. 좋은 글이 너무 많아 앞뒤 맥락을 모두 살펴보시는 게 좋지만.. 그래도 몇 개 가져와봤어요.


그는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 지겨웠다. 숲을 헤매는 것이 지겨웠고, 숲 자체가 지겨웠다. 그는 단어들이 쏟아져나오는 자기 입안의 병이 지겨웠다.
그녀는 당당하게 세상 속을 헤쳐 갔다. 의로운 척하지 않으면서 도움을 주고, 지나치게 사과하지 않으면서 겸손했다. 그녀 곁에 있으면 피부에 닿는 실크처럼, 본능적으로 기분이 좋았다.
당신 이야기는 십중팔구 매우 평범하다. 그렇다고 당신 이야기가 쓸모없다는 뜻은 아니다.
내가 결코 온전히 그를 가질 수 없었던 건 내가 늘 그를 원했다는 뜻이었다.



사족

— 종이책 분량은 684쪽으로 분량 압박이 꽤 있는 편입니다. 하지만.. 레슬리 제이미슨은 글을 정말 잘 썼고 그 분량을 아주 기가 막히고 절묘하게 잘도 이끌어갔어요. 논리적으로 잘 쓰였고, 지루하고 단조로운 구석 없이 재미있습니다.

— 하버드 나온 백인 여자가 웬 알코올중독에 자기 연민? 이라는 생각이 먼저 드신다면 이 책과 안 맞으실 수 있어요.

— 저는 이 책이 너무 좋아서 그의 전작 《공감 연습》도 샀답니다.


http://aladin.kr/p/mPgbD



연휴나 주말에 읽으면 좋을 것 같았는데 생각해보니.. 뭐 굳이 중독과 회복에 관한 이야기를.. 그 시간에 읽나 싶기도 하네요.. 언젠가 찐하고 밀도 높은 글을 읽고 싶으실 때 꼭 이 책을 발견해주시길!


새해 복 싹싹 긁어모아 왕창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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