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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솔지책 Apr 05. 2022

진짜로 한 달 뒤에 지구가 멸망합니다.

멸망 이전의 샹그릴라



너무 오랜만에 글을 올리면서 굳이 멸망 이야기를..?이라는 의문이 저도 가시질 않지만요..

제가 나기라 유에 이렇게나 진심입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책은 나기라 유가 쓰고 김선영이 옮긴 《멸망 이전의 샹그릴라》(한스미디어, 2021)입니다.



나기라 

— 저자인 ‘나기라 유’는 일본 작가로 계속 BL물을 쓰다 전작인 《유랑의 달》로 본격 기성 출판에 뛰어든 작가입니다.

— 아마 《유랑의 달》이 서점 대상(일본 서점 직원들이 꼽는 책으로 일본에서는 웬만한 상만큼 가치 있게 여기는 것 같아요) 순위에 올랐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당시 소감 영상이 《유랑의 달》 소개 페이지에 올라와 있어요. 저는 《유랑의 달》을 읽고 눈물을 줄줄 흘렸기에 그 영상까지 챙겨보았는데, 자긴 늘 서점에 있었다, 언제나 서점에서 책과 함께 있었는데 그곳에서 일하는 분들이 직접 꼽은 책이 되었다는 게 너무 감격스럽다, 라는 식으로 이야길 했던 것 같아요. 평생을 책과 함께 뒹군 저자로서는 서점 대상이 정말로 큰 영광이었을 것 같아요.

— 하지만 《유랑의 달》은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릴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어요. 성인 남성이 집에서 학대받는 여자 미성년자와 함께 지내게 되는 얘기거든요. 한국이나 일본이나 오갈 데 없는 소녀들을 하룻밤 재워주는 대가로 성관계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딱 그렇게 흘러갈 법한 설정을 해놓고 완전히 다른 상황을 만들어요. 저는 그 이야기에 눈물 콧물 줄줄 흘리며 마음 아파했지만 이런 소재 자체를 쓰면 안 됐다는 평이 국내에 꽤 있었습니다.




, 이제 지구가 멸망합니다

— 이 책은 제목처럼 지구가 멸망하기 이전의 이야기를 그립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 온 그놈의 소행성 충돌로 정말 지구가 사라질 위기에 처한다는 거예요. 사실 이 이야기를 누가 믿겠어요? 여기 나오는 인물들도 믿지 않아요. 모든 걸 다 가진 소녀도, 가진 게 거의 없는 소년도, 혼자 소년을 키워온 악바리 엄마도, 상습적으로 누군가를 때려온 야쿠자도, 정상급 가수도요.

— 그러다 전 세계에서 이 충돌은 실제고 지금으로선 막을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못 박으며 사람들은 패닉에 빠집니다. 약탈과 강도와 살인이 일상처럼 일어나고 사람들은 자신을 지키기에 급급해집니다.

— 하지만 《멸망 이전의 샹그릴라》에서는 멸망 이전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그리진 않습니다. 나기라 유에게 중요한 건 멸망을 앞둔 ‘세상’이 아니라 멸망을 받아들인 ‘인간’이었거든요. 이 책의 주인공인 다섯 명(소녀, 소년, 중년 여자, 야쿠자, 가수)은 각기 다른 이유로 서로 얽히게 되고 멸망 상황을 합심해 타개해갑니다.



멸망 직전/직후의 살인 (미수)

— 공교롭게도 주인공 다섯 명은 모두 누군가를 죽이거나 죽일 뻔해요. 멸망이 올지 모르고 죽였거나 멸망이 온지 모르고 죽였거나 멸망 이전의 상황에서 사랑하는 이를 보호하기 위해 죽일 뻔하거나······ 어쨌든 모두 누군가를 해치게 됩니다.

— 사실 어차피 다 죽는 마당에 뭐 그게 큰 의미가 있나, 싶을 수 있지만 주인공들은 좀 다르게 생각하게 돼요. 이전까지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도 하고 깊은 죄책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리고 책 전반적으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어차피 틀린 거라는 걸 계속 말하기도 하고요.

하늘을 향해 뱉은 침은 언젠가 제 머리 위로 떨어지는 법이다. (117쪽)
우리가 맞은 만큼 누군가를 때려도 우리가 맛본 고통은 상쇄되지 않는다. 그것을 젊었을 때 이해했다면 조금 더 다른 삶을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이해하려면 어느 정도 인생 경험이 필요해서, 이해했을 때에는 지나간 실수를 되돌아보는 처지일 때가 흔하다. 그러니 하다못해 더는 나빠지지 않도록 뒤늦게나마 막아보려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부조리해도 우리에게는 그것이 성장이다. (254쪽)



우리가 지금 하고 싶은 

— 이 다섯 명은 결국 살인이나 증오나 혐오가 아닌 하고 싶은 걸 하기로 합니다. 지금껏 억눌러왔던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려 멸망하는 날 공연을 열고, 서로에 대해 숨겨두었던 마음을 드러내고, 지키고 싶은 이를 한껏 지키는 식이에요.

— 그래서 이들의 지난 이야기가 꽤 많이 나옵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성격인지, 지금껏 놓치고 산 건 무엇인지, 뭘 후회하는지 등이요. 한 명 한 명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사람을 상습적으로 때리던 야쿠자마저 조금은 이해가 될 지경이에요(물론 저는 그의 행동이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 저는 이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이들 삶에 저를 두어봤는데 사실 멸망 이전에 뭘 해야 할지는 도저히 감이 안 잡히더라고요. 한 달 뒤에 이 지구가 싸그리 사라진다면 저흰 뭘 해야 할까요? 뭘 하고 싶을까요? 미안했던 친구에게 사과를 할까요? 어디에도 가지 않고 책이나 읽으려나요?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뒤 표지에는 네 명이라고 나오지만 사실상 주요 인물은 다섯 명입니다!


성별도, 나이도, 살아온 삶도 전부 다른 사람들의 소멸

—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좋았던 건 여기 나오는 주인공들이 정말 너무도 다른 특성을 가졌다는 거였어요.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는 소녀도 있고, 보잘것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 같은 소년도 있고 뭐 굉장히 다양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저마다의 외로움과 결핍이 있어요.

— 너무 당연하지만 자주 잊고 사는 것 중에 하나가 모든 사람은 다 외롭고 힘들다, 인 것 같아요. 너무나 대단해 보이는 사람도, 부러울 게 하나도 없어 보이는 사람도 다들 도저히 말하지 못한 내면의 괴로움과 아픔이 있잖아요? 저도 그걸 자꾸 까먹고 말더라고요. 어차피 다 같은 인간이라 쟤도 똑같이 외로울 텐데 말이죠.

저는 나기라 유가 그런 면을 정말  보여준다고 생각해서 좋아하는  같아요. 사실 겉으로 보이는  그렇게 대단치 않다고, 그들의 속마음과 살아온 맥락이 어떨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라고 계속해서 말해주거든요. 저로서는 계속해서 이런 이야기를 써내는 작가를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같아요.



사족

이 책을 볕이 내리쬐는 바닷가에서 읽었는데요. 멸망 이야기를 읽고 있자니 어쩐지 지금 이 볕을 한껏 누리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요. 어차피 소멸을 향해 가는 인생! 후회하지 말고 지금 하고 싶은 걸 하자! 싶었습니다.



늘 그랬듯 읽고 계신 분들의 안녕을 빕니다!



http://aladin.kr/p/94Gv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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