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 감독의 소설집
아주아주 오랜만에 소개하는 책은 이창동 감독의 소설집 <녹천에는 똥이 많다>입니다.
소설집을 읽은 지 꽤 되긴 했지만 가끔씩 불현듯 떠올랐고 마침 아픈 5월이기에 소개해봐요.
이창동, 《녹천에는 똥이 많다》, 문학과지성사, 1992.
— 이 소설이 처음 나온 건 1992년입니다. 무려 30년 넘게 살아남아 여전히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는 책이기도 하죠.
— 출간은 1992년이지만 1980년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인데요, 모든 분이 아시다시피 그 당시는 정치적으로 아주 혼란스럽고 모두에게 가혹한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 찾아보니 이창동 감독은 1954년생이더라고요. 그는 1980년대에 20대였고 어쩌면 그때 직간접적으로 했던 경험들을 녹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누군가 그랬죠. 모든 이야기는 아주 조금이라도 자전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고요..?)
— 이 책에는 총 다섯 개 단편이 실렸는데요, 모두 군사정권과 관련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 당시의 혼란스러운 사회 상황과 맞물려 있는 개인들, 특히 소시민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어요. 운동을 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고민을 하는 대학생, 운동을 선도하지만 모순적인 엘리트, 그저 내 보금자리 하나 지키면 그만이라 생각하는 사람들까지(물론 복잡한 이면이 존재합니다) 여러 인간 군상을 볼 수 있습니다.
— 다섯 개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것은 역시 ‘시대’입니다. 개인들이 개인만의 문제로 지나가야 할 모든 시절을 시대는 깡그리 불태우고 말죠. 잡혀갈까 봐, 내일도 밥을 못 먹을까 봐, 내가 도움이 되는 건가 하는 고민들. 물론 누군가는 지질한 선택을 하고 누군가는 2020년대에는 도무지 납득하지 못할 일을 저지르기도 하지만······. 그 시대를 지나오지 않은 저로서는 가타부타 말을 꺼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 저는 이 책을 니시카와 미와 책에서 알게 됐는데요, <진짜 사나이>라는 단편의 줄거리가 나오는데 꽤 인상적이더라고요. 아주 짧게 설명해보자면 시위에 참가했던 한 작가가 어쩌다 알게 된 일용직 노동자 ‘장병만’에게 시위를 독려하며 벌어진 일들을 그린 이야기입니다.
— 저 같은 게 무슨 운동이냐고 하는 장병만에게 작가는 선생님 같은 분이야말로 운동을 하셔야 한다, 우리는 세상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같은 얘기를 합니다. 장병만 선생님은 그에게 설득되고 그는 언젠가부터 열렬한 투사가 돼버립니다.
— 작가는 그런 장병만 선생님이 걱정되어 이런저런 말로 설득을 하며 그의 행동을 만류해요. 아니 집안도 돌보지 않고 이렇게 하시면 어떡합니까, 이런다고 세상이 바뀌는 건 아니잖아요. 함께 세상을 바꾸자고 했던 작가는 장병만에게 이런다고 세상이 바뀌냐는 말을, 어쩌면 장병만 선생님이 처음부터 품었던 의문을 다시 돌려줍니다.
— 저한테는 다섯 개 이야기 중 가장 강렬하게 남은 이야기였어요. 말만 번지르르하게 늘어놓는 엘리트의 허상을 아주 지질하고 씁쓸하게 잘 보여준 것 같았거든요. 여러모로 여운이 긴 작품이니 시간이 안 되신다면 이 작품만이라도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 사실 2020년대에 읽기에 좋은 책은 아닐 수 있습니다. 이 책과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사람이라 그런지.. 마지막 단편 <하늘등>은 아무래도 납득은 되지 않았습니다...
— 이 책을 읽고 어쩐지 <버닝>이 많이 떠올랐어요. 아주 다르지만 어떤 면에서는 아주 닮은 시대가 아닌가, 이창동 감독은 시대에 의해 스러지는 개인의 시절을 늘 눈여겨보고 있구나.. 싶기도 했습니다.
— 책 제목 자체는 한글이지만 책에 실린 단편들의 제목은 한자와 한글이 혼용되어 쓰였어요. 너무 오랜만에 이런 책을 봐서 좀 신기하더라고요.
근 두 달 만에 좀 무거운 책을 소개하는 것 같지만 여러분의 5월이 찬란하면서도 아플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깊게 기억하고 힘껏 저항할 수 있는 달이 될 수 있길 바랍니다.
오늘도 손 번쩍 들어 인사 보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