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정신을 놓기도 하지만 꿈속에서 만난 S에게 ‘페미니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나는 괜찮아졌다.
S와 연인 사이가 된 지 반년쯤 되었던 때, 나는 막연하게 공무원이 되어야지 생각했다.
그맘때의 나는 극작가를 꿈꾸고 있었다. 길이 잘 보이지 않았기에 마음이 흐려져 자주 다른 직업을 머릿속으로 굴려보긴 했지만 공무원이 내 성향에 맞지 않는다는 것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내가 공무원을 희망하게 된 건 S의 영향이 컸다.
S는 글을 썼다.
나는 그런 S가 좋았고 S가 계속 글을 쓰며 살기를 바랐다.
S가 작가가 된다는 보장은 없었고 된다 하더라도 작가로 사는 건 쉽지 않을 거라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S가 걱정 없이 글을 쓰고 살 수 있도록 공무원이 되려고 했다.
내 글은 까맣게 잊은 채로.
그때는 그게 정말 좋았다. 누군가를 그토록 좋아할 수 있다는 게 기뻤다.
괴롭게 했던 모든 일도, 화해하지 못한 과거도 나에게 아무런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가끔 찬바람이 불긴 했지만 항상 봄같이 행복하다고, 그것이 최선의 삶과 마음이라고 진심으로 믿었다.
하지만 돌아보니 그건 병적인 마음이었다. 그때의 나는 마치 마취제를 맞은 사람처럼 S와 관련되지 않은 일에 무감각해져 갔다. 나를 아끼는 주변 사람들을 잘 챙기지 않았고 세상사에도 관심이 없었다.
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좋아했던 일기 대신 S에게 편지를 썼고 원했던 모든 것에 시들해진 채 성향에도 맞지않는 공무원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아무런 저항 없이 빠르게 나를 버려 나갔다.
S로 가득 채웠던 계절이 갑작스럽게 끝나고, 나는 환절에 시위하듯 다른 계절에는 살고 싶지 않다고 되뇌었다. 누가 나 좀 죽여줬으면 좋겠다고, 굳이 뽑자면 S의 손에 죽고 싶다고, 그렇게라도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S와의 관계에서 나는 왜 2년이 지난 후에도 저런 극단적 주정을 하는 결말을 맞이하게 된 것일까.
‘참 나쁜 사람이었지’하고 쉽게 그 원인을 S에게 돌릴 수도 있다.
하지만 방점을 찍을 곳은 S가 아니라 ‘S와의 관계’라고 생각한다.
‘이성애 기반의 연인관계’. 과거 S와 나의 관계는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여성 혐오가 공기처럼 퍼져있는 한국사회에서 ‘이상’으로 여겨지는 (이성애 상대로서) 여성의 모습은 어떨까? 일단 여성의 체구는 남성보다 아담해야 하고, 심리적으로든 환경적으로든 상대보다 취약한 구석이 있어야 함은 물론 때때로 상대의 자존감을 훼손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구원과 지지를 행해야 하며, 무엇보다 사랑(이성애)없이 온전히 행복하고 씩씩하면 안 된다. 많은 여성들이 위와 같은 연인상을 학습하고 자신을 이상에 가깝게 두려 노력한다. 결혼이 제도적 안전장치처럼 여겨지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이 같은 포지셔닝은 장려, 강화, 세뇌된다.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특히나 나는 착하다, 또는 여성스럽다는 말을 유난히 많이 들으며 커온 아이였다.
어린 시절, 가족동반 동창회에 가면 가장 착하고 철든 훌륭한 맏딸로 통했고, 친척들 또한 눈치 빠르고 싹싹한 딸을 둔 부모님을 부러워했다. 성인이 된 후로는 과에서 치러진 최고의 신붓감 앙케트에서 1위로 꼽히기도 했고, 여성스럽다고 여겨지는 옷을 일절 입고 다니지 않음에도 불구 여성스럽다는 말을 숱하게 들어왔다. 어르신들의 며느릿감에 대한 애정 어린 말들도 나에겐 익숙했다. 나의 마음을 죽이고 눈치 빠르게 상대의 마음을 읽어 행동할 때 나는 주로 이런 말을 들었다.
그 말들이 코르셋이 되어 나를 꽉 죄게 될지 당시의 나는 알지 못했다. 항상 칭찬의 상황에서 들어왔던 말이니까, 그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았고 자존감이 회복되는 듯한 만족감 마저 느꼈었으니까. 하지만 그 말들은 나를 주체가 아닌 객체로 살게끔 이끈 마취제일 뿐 칭찬도 뭣도 아니었다.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잠잠히 쌓아온 여성성 코르셋이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부각되는 ‘이성애 기반의 연인관계’에서 폭발하게 된 것이다. 내 욕망이 아닌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고, 발판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고 ‘나’보다 사랑 또는 사랑의 대상을 우선순위에 두는 것. 그래서 결국 나는 나 죽이러 온다는 사람을 두 팔 벌려 환영하겠다는 주정을 하는 결말을 맞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이 이야기의 결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여성성 코르셋은 삶의 많은 장면에서 나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간단하게 벗어낸 외모 코르셋과 다르게 태도와 성격 전반에 걸쳐있는 이 코르셋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벗어야 할지 아직 뾰족한 수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냥 타고난 거야!’하고 우기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조금 둘러 가더라도 후진은 없을 것이다. 내가 아닌 것을 내 위에 두는 게 어떤 과정과 결과를 가져오는지 이제는 알게 되었으니까.